절벽에서 - 이성목 절벽에서 - 이성목 바람이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를 풀어 주었네 저물다가만 저녁 어둠에 슬쩍 밟혔을 길이 비명에 휘어져 있었네 세상의 가파름이 나를 불러내었네 죽음도 이곳에선 사소한 일이었을 텐데 한 순간에 뒤바뀌는 바람이었을 텐데 그대 오래도록 한 무더기 꽃 움켜쥐고 있었.. 한줄 詩 2015.10.28
지상의 가을 - 심재휘 지상의 가을 - 심재휘 보세요 당신 무엇인가 절정에 이른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제 속의 빛들을 온 힘으로 소진하는 저 나무들의 붉고 찬란한 예감 가을은 치명적으로 깊어만 가는데 내 어린 딸은 저렇게 즐거워도 되는 건가요 지상의 가을은 마지막 가을인 듯 지독하게 단풍 드는.. 한줄 詩 2015.10.27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마음을 얻는다는 것 - 엄원태 십년이 넘는 공부 끝에야 암컷의 마음을 얻어 교미할 수 있는 새가 있다 코스타리카의 긴꼬리매너킨은 탱고 스텝의 달인들 그들의 일생은 가무(歌舞)에 바쳐진 셈 소년 매너킨은 생후 오년째부터 스스로 연마하여 몸을 만들고 육년째도 여전히 독학으로 노.. 한줄 詩 2015.10.21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이 내리면 그림자가 자란다 잊었던 슬픔을 꺼내 먹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이 세상 가장 떨리던 그날이 생각나 닫힌 입술을 열던 저녁이 그 아이 속눈썹 닮은 땅거미 거뭇거뭇 돋아 오를 때 기러기 울어 가을 깊던 그 골목 다시는 오지 않으리 골목 끝.. 한줄 詩 2015.10.21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 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 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 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 한줄 詩 2015.10.21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 이은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 한줄 詩 2015.10.19
눈물의 오후 - 박정만 눈물의 오후 - 박정만 눈물이 흔해서 괴로왔다. 날 기울면 창 밖에 어둠이 지고 어둠이 지고 나면 때 없이 눈물이 소금처럼 밀려왔다, 소금처럼. 거룩하고 거룩한 세월, 한 목숨을 견디지 못하고 매양 눈물이 오고 어느 때쯤이었을까, 죄와 불면이 무섭게 자라나는 어두운 밤에 나는 슬픔.. 한줄 詩 2015.10.19
가을의 빛 - 장석남 가을의 빛 - 장석남 누군가 울먹이며 지나갔는가 일개 소대의 코스모스들이 허리마다 올올이 바람을 감고 서서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내내 빛내고 있었으니 이 빛깔들은 이후 어느 길목을 돌아 어디로 종종이며 흐를 것인가 그것이 눈물겨운 것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밥을 끓이.. 한줄 詩 2015.10.19
이 가을에 - 박두규 이 가을에 - 박두규 가을을 맞이하는 이파리들 그 마음들은 어떨까 어떤 색으로든 자신의 색깔을 결정지어야 하고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것을 가을을 맞아 나는 무슨 색깔로 매달려 있는 지가 궁금하다 연노랑에 선다홍의 고운 물결을 이루었는지 똥색으로 꼬실라진 단풍이 되.. 한줄 詩 2015.10.19
막차는 없다 - 송경동 막차는 없다 - 송경동 비 그치고 막차를 기다리고 선 가리봉의 밤 차는 오지 않고 밤바다 쪽배마냥 작은 리어카를 끌고 온 한 노인이 내 앞에 멈춰 선다 그이는 부끄럼도 없이 휴지통을 뒤져 내가 방금 먹고 버린 종이컵이며 빈 캔 따위를 주워 싣는다 가슴 한 가득 안은 빈 캔에서 오물이 .. 한줄 詩 2015.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