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의 빛 - 장석남

마루안 2015. 10. 19. 23:10



가을의 빛 - 장석남



누군가 울먹이며 지나갔는가
일개 소대의 코스모스들이 허리마다 올올이 바람을 감고 서서
이제 더 오래 못 서 있을 빛을 내내
빛내고 있었으니
이 빛깔들은 이후 어느 길목을 돌아
어디로 종종이며 흐를 것인가

그것이 눈물겨운 것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밥을 끓이고 있는
추억의 이마가 너무 푸르러서만이 아니라
내가 가는 길이
종내는 혼자서 저렇게 허리에 바람을 감는 길이라는
이 가을 속 조용한 손님의 말씀이 있었으니

누군가 엉엉 울고 갈 이가 있어서
또 그가 손목을 만지작이며 걸리는
작은 새끼들의 울음도 있어서
낮에 나온 달이 저렇듯 오랫동안 창백하게
이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두커니 오동나무도 한 주 서 있는 것은 아닌가



*장석남 시집, 젖은 눈, 문학동네








가을볕 - 장석남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으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작과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