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 이은규

마루안 2015. 10. 19. 23:42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 -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 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 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쪽으로 흐르고 그쪽으로 떠돈다
지명(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시집,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고경(高景) - 이은규



걷다가 죽고 싶다
때로 한 줄 유언은 오랜 꿈보다 멀고
 

고원을 떠도는 발자국들이 다른 무리를 만났을 때 꼭 건네는 질문이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 길이지, 왜 이 길을 택했지
바람의 무리도 없이 걷고 또 걷는 자신 스스로를 질문한다
풍경을 빌려 떠도는 동안에도 재차 묻는다는 건 더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는 뜻

 
고원의 후면(後面), 그늘에 고여 있을 바람
어떤 발자국도 되돌아가지 못하므로 길은 끝이 없고

 
어디쯤 할 일을 다 마치고 누운 말 한 마리를 본 적 있다
허공의 묘지기, 독수리가 파먹은 텅 빈 눈 속으로 내리던 눈(雪)
안 보이는 검은 눈에 박히던 적막, 펄럭이던 말갈기만 바람을 불러왔다
흰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잠들었지
언젠가 고삐를 놓아 떠나보냈던 그 말이 맞기를, 아니기를

 
걷다가 쓰러질 발자국을 떠올린다
맴돌던 검은 날개가 접히고 목 쉰 묘지기의 배웅 너머 텅 빈 눈 속으로 내리는 눈(雪)
그늘에 얼어붙은 적막, 남은 몇 올 눈썹만 바람을 부리겠다
언젠가 언 손등에 입김으로 쓴 유언이 완성되지 않기를, 되기를
흰 눈을 수의처럼 덮고 잠들겠지


눈썹이 불러올 먼 곳의 바람
빈 동공으로라도 닿고 싶은, 행선지 쪽으로 부는





# 다소 긴 제목이 달린 첫 번째 시는 이은규 시인의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아주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밀도가 탄탄해 술술 읽혀지는 좋은 시다.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딱 맞아 떨어지는 시인이다. 부디 첫 시집으로 밑천이 달려 잊혀지는 시인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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