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황혼에 취해 - 조길성

마루안 2015. 10. 21. 23:14



황혼에 취해 - 조길성



황혼이 내리면 그림자가 자란다
잊었던 슬픔을 꺼내 먹으며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으면
이 세상 가장 떨리던 그날이 생각나
닫힌 입술을 열던 저녁이
그 아이 속눈썹 닮은 땅거미 거뭇거뭇 돋아 오를 때
기러기 울어 가을 깊던 그 골목
다시는 오지 않으리
골목 끝으로 굴러간 굴렁쇠가
돌아오지 않듯이
살다가
살아가다가
오늘도 황혼에 취해 술집 문을 들어설 때
아직도 떨리는 가슴속으로 문득
심장을 더듬는 손길
다시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



*시집, 징검다리 건너, 문학의전당








늙어간다는 건 - 조길성



퇴근길 버스
돌아가신 친구 아버님을 닮은 중늙은이
곱슬머리 코끝에 걸린 안경
거뭇한 뺨 위에 퍼지기 시작하는 검버섯
팔뚝에 꿈틀거리는 거머리 닮은 힘줄
목과 허리가 아직은 꼿꼿하지만
얼마 안 있어 세월의 따뜻한 손길에
순하게 굽어지리라 튼튼한 두 다리는
이내 세 개의 다리가 되어
지팡이 더듬어 잃어버린 풀숲을 뒤적이리라
혹시라도 거기 금니같이 빛나는 어제를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어느 빛나는 아침이거나 밤이라도 좋다
천 년도 만 년도 더 된 오래된 운명의 눈빛이
버스를 세우고 그를 우리를 바라볼 때
어떤 빛깔의 신호등이 켜질지를
미리 생각할 수 있을까






# 조길성 시인은 1961년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났다. 2006년 계간 <창작21>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징검다리 건너>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