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절벽에서 - 이성목

마루안 2015. 10. 28. 01:18



절벽에서 - 이성목



바람이 가지에 맺힌 꽃봉오리를 풀어 주었네
저물다가만 저녁
어둠에 슬쩍 밟혔을 길이 비명에 휘어져 있었네
세상의 가파름이 나를 불러내었네
죽음도 이곳에선 사소한 일이었을 텐데
한 순간에 뒤바뀌는 바람이었을 텐데
그대 오래도록 한 무더기 꽃 움켜쥐고 있었네
돌아보지 말자 마음에 먼저 세웠던 벽
나를 따르던 발자국들 뒷걸음질치는 것이 보였네
뒷편 마을 낮고 흐린 살림집
식솔들을 찾아 나서는 빛의 물결이 눈물에 일렁거렸네
죽음이며 삶미 모두 나를 다녀갔던 것일까
허물어진 몸의 문을 열고 나를 불렀네
허리에 감기는 차갑고도 뜨거운 혀를 느꼈네
저 붉은 한 무더기 꽃
버리지 못한 생의 비밀을 여기서 알 것 같았네



*시집, 남자를 주겠다, 모아드림








삶 혹은 그 확인을 위한 다섯 개의 명사 - 이성목



1. 가뭄


어머니가 가위를 들고 강으로 나가 얇은 강물을 끊어 돌아오시더니 헤진 무릎에 그것을 대고 꼼꼼하게 박았다. 자주 엎어지고 자주 상처 낸 그 무릎 꿇고 앉으니, 덧대어 기운 옷이라서 그랬을까.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가 배겨 무릎이 아팠다. 나는 마른 눈물로 얕은 마음의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2. 모래시계


시계가 시간을 몸 아래로 무너뜨린다
모래가 몸을 허물어서라도 가고 싶었을
가장 낮은 바닥으로 누군가 먼저 건너가고 있다
나는 지금 뭉개지는 세월의 등에 앉아 있다
뭉개어져서라도 한세상 건너고 싶었을 사막과
저 까닭도 없이 사라지는 모래알 같은 열망들
바람 한 점 없는 현세의 유리병 속에서
쉼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다



3. 새서울 여관


숙소에 들어서자 다리 부러진 침대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옆구리를 뚫고 나온 스프링이 벽을 긁으며 소리를 질렀다
암캐 한 마리 콘돔을 씹으며 물컹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늙은 주인 여자는 따로 국밥을 시켜 더럽게 말아먹었다
한낮에는 다리가 가늘고 긴 새침대가 걸어 들어갔다
방에 어둠이 들이닥치자 침대의 모서리는 눈부시게 빛을 냈다
다시 눈뜰 무렵에는 하루살이의 날개가 문밖으로 쓸려 나갔다



4. 공동 수도


공동 수도료를 나누면서 싸웠다.
수도꼭지를 틀자 녹물 같은 욕설이 쏟아졌다.
양재기에 마른 쌀을 북북 치대며
누군가가 붉은 손등으로 울고
나는 눈물의 누수를 따라 낮게 수돗가로 스며들었다.
눅눅하고 어둡던 그 여름의 하루
하루살이 날곤충처럼 단수 통지가 날아들고
검정 고무줄로 동여맨 녹슨 수도꼭지는
마른 입 댈 수 없을 만큼 뜨겁게 달아 있었다.



5. 立志


나는 食口가 넷이다.
그 중 제일 큰 밥구멍은 내가 가졌고
작은 밥구멍 두개는 아내가 수유(授乳)를 위하여
제 젖꼭지를 물려 두었다.
내 나이 벌써 서른 여섯,
한세상 뜻을 세우기는 고사하고
쪼글쪼글해진
하나 남은 아내의 허기를 채워 주는 일,
그걸 바로 세우는 것도 힘에 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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