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마루안 2015. 10. 21. 23:02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 허연

 

 

배고픈 고양이 한 마리가 관절에 힘을 쓰며 정지 동작으로 서 있었고 새벽 출근길 나는 속이 울렁 거렸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전진 아니면 후퇴다. 지난 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
얼굴 도장 찍으러 간 게 잘못이었다. 나의 자세에는 간밤에 들은 단어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의 자세에는 오래전 사바나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녀석이 한쪽 발을 살며시 들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나는 골목을 포기했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나직이 쓰레기봉투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와 나는 평범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 허연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내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내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거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