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히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시집/ 탄수화물적 사랑/ 한국문연
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엄마가 밥 먹으러 간 사이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죽음은 객사일까 아닐까
'네 엄마 얼른 오라 해라'
전화기 건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삼팔따라지 박정희 신봉자
집에선 평생 재야인사
선거 때 되면 반골인 나 때문에 밥상이
몇 번 뒤집어졌지만 그것 빼고는
약한 심장 때문에 식구들 고생시킨 것 빼고는
착하게 살다 간 황해도 평산 상회 큰아들
검은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던 손이 하얀 남자
어릴 적 탁발승이 일러준 대로 절 공부했으면
정말 공력 높은 스님이 되었을까
회한도 비애도 없이 구름처럼 살았을까
죽은 다음에야 궁금해진 아버지 유년
나에게 당당히 용돈을 요구했지만
김 선생이라 부르며 공손히 받던 사람
죽기 전에 개신교 신자가 된 아버지
일생에 반전 한 번쯤 있게 마련이지
찬송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이 마뜩잖은 나와
죽어서도 밀당했지만 당신 뜻대로 살다 간
촉 닳은 만년필 외엔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공수래공수거를 몸소 보인
비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시인은 인천 출생으로 성신여대 전통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북쪽 강에서의 이별>, <탄수화물적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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