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마루안 2021. 12. 29. 21:37

 

 

흔한 낙타에 대한 - 김미옥

 

 

햇살을 등에 꽂고 낙타가 걷는다

무심히 혀로 콧구멍을 핥는다

나는 편안히 앉아 익숙한 비애를 본다

와이드 화면 속 모래바람은 회오리치고

열 받은 팝콘은 지리멸렬 터진다

낙타는 우스꽝스럽게 울지만

눈물을 저장해 놓고 가볍게 씹는 법을 안다

단내가 화면 밖으로 품어 나온다

지긋이 눈뜬 낙타의 검은 망막에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다

뜨거운 혹 만년을 이고 다녀도

긴 눈썹 한번 깜빡이면 화면이 바뀐다

마른 오아시스에는 오늘도

불굴을 되새김질하는 흔한 낙타가 있다

 

 

*시집/ 탄수화물적 사랑/ 한국문연

 

 

 

 

 

 

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엄마가 밥 먹으러 간 사이

병원에서 혼자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 죽음은 객사일까 아닐까

'네 엄마 얼른 오라 해라'

전화기 건네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삼팔따라지 박정희 신봉자

집에선 평생 재야인사

선거 때 되면 반골인 나 때문에 밥상이

몇 번 뒤집어졌지만 그것 빼고는

약한 심장 때문에 식구들 고생시킨 것 빼고는

착하게 살다 간 황해도 평산 상회 큰아들

검은 바바리코트를 즐겨 입던 손이 하얀 남자

어릴 적 탁발승이 일러준 대로 절 공부했으면

정말 공력 높은 스님이 되었을까

회한도 비애도 없이 구름처럼 살았을까

죽은 다음에야 궁금해진 아버지 유년

나에게 당당히 용돈을 요구했지만

김 선생이라 부르며 공손히 받던 사람

죽기 전에 개신교 신자가 된 아버지

일생에 반전 한 번쯤 있게 마련이지

찬송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이 마뜩잖은 나와

죽어서도 밀당했지만 당신 뜻대로 살다 간

촉 닳은 만년필 외엔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공수래공수거를 몸소 보인

비정치적인 아버지

 

 

 

 

# 김미옥 시인은 인천 출생으로 성신여대 전통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북쪽 강에서의 이별>, <탄수화물적 사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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