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중심 - 김기리

중심 - 김기리 내게 있던 중심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자꾸 비틀거리던 것들만 내 몸에 깃들고 싶어 할까 그 수많던 얼음 신발은 유독 내 발에만 신겨 있는 걸까 바람 부는 날의 한 그루 나무라 여기자 신나게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중이었다고 여기자 아직 고요가 깃들지 않은 몸이라 이렇게 고마운 휘청거리는 중심 그냥, 그냥 휘청대는 중심에 서서 달력 한 장 또 넘어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부축했던 사람들이 흔들리는 나의 중심으로 들어오고 있다 *시집/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어리고/ 문학들 저울 - 김기리 저울에는 바르르 떠는 중심이 있다는 거지 반듯이 이쪽과 저쪽이 있어야만 제 몫을 다 한다는 거지 이생에는 업으로 부르는 이름과 침묵해야 할 이름들이 중심에 모여들어 바르르 떨고 있을 거라는 거지 어제는 ..

한줄 詩 2022.02.04

언어의 높이뛰기 - 신지영

몇 페이지 읽으면서 바로 느낌이 오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참 좋은 책을 골랐다는 뿌듯함도 생긴다. 읽는 내내 나의 말습관에 대한 반추와 함께 말 잘하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큰 기술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 책이 화법에 관한 처세술을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언어의 사회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성격처럼 언어 습관도 타고난 것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본다. 글보다 말이 훨씬 그 사람의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언어학자이자 음성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부문이 너무 많다. 가령, 언제부터 대통령 당선자가 당선인이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에 무릎을 쳤다. 노무현까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에는 당선자였다. 이명박 때부터 당선자가 당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지영 교수는 언..

네줄 冊 2022.02.04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마을에는 오백 년도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몸통 여러 곳이 복사뼈처럼 울룩불룩하고 마을 뒷산도 가뿐하게 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뒷산에는 또 너럭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개망초 다발이나 잔대 싹, 쑥개떡이 차려진 소꿉 밥상이 서서히 별 보자기에 덮이던 풍경은 온종일 서럽던 아이들이 차린 것이었다. 너럭바위에서 노는 게 심심했던 형과 누나들은 어른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몰래 느티나무의 복사뼈를 맨발로 디디고 올라가 제일 높은 곳을 손으로 짚고 내려왔다. 얼마 뒤 그런 형과 누나들은 군불을 지피는 어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다가 도시로 떠났다. 뙤약볕 비탈밭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재구네 모친 넷째가 다녀갔는지 복사뼈 닮은 봉분 앞에 개망초꽃 한 다발 *시집/ 이 골목은 만만한 ..

한줄 詩 2022.02.03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남도창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는 아버지는 사시사철 감수성이 풍부한 사내다 날씨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복 더위에 어머니의 턱을 어그러뜨려 놓고 보양식을 사먹으러 읍내로 나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가리고 손을 내젓고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마을길을 피해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웅크린 채, 별이 뜨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부르러 오기를 기다리던 나날 겁 없이 잠들어 버리던 나날 무덤에 기대어 잠이 든 나는, 더 이상의 비극을 예상하지 않았다 *시집/ 즐거운 장례/ 곰곰나루 11월 - 박소원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손등에 점이 된다 어머니 귓바퀴에는 두 개의 점이 굽은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아버지가 다녀가는 계절 아버지는 운..

한줄 詩 2022.02.03

개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지만 사람들이 더 민감한 - 박찬호

개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지만 사람들이 더 민감한 - 박찬호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네가 나를 감싸주는지 어차피 대화로 얘기하지 않아도 아는 것 육감으로 아는 것 개는 나에게 묻지 않지만 내 눈을 보고 아는 것 너는 나에게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는 그것 그만큼 예민하고 중대한 것 끝없이 눈에 보이고 마음에 차야 하는 것 개에게는 믿음으로 보이고 사람에게는 현물로 대신해 보이는 것 개에게는 모든 빗장을 풀지만 네게는 꼭 마지막 하나씩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 개나 사람이나 다들 느끼는 것 육감으로 알지만 너는 칠감(七感)으로 보이길 요구하는 것 그 사랑 무한할 거 같은 유한의 작은 사랑 *시집/ 꼭 온다고 했던 그날/ 천년의시작 확증편향 - 박찬호 그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삶의 신념 혹은 지울 수 없..

한줄 詩 2022.02.03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너그러운 순환 노루귀 같은 말들과 우애하며 살자 그랬습니다만 눈을 뜨면 매일 첫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맨발의 감촉이 살아납니다 저녁엔 동굴로 돌아와서 불을 켜고 동사들의 야행성을 잠재웁니다 소금쟁이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는 두 개의 고원 사이 살얼음 한 장 도무지 녹을 기미가 없는 아래층 남자가 팔팔 끓고 불콰해진 죽창이 어젯밤부터 내 쳐진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여기, 내가 살고 있다는 말보다 그가 살고 있다는 말이 더 실감이 납니다 쏟아져 눈부시게 흩어지는 바둑알 또는 큰 대야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또는 희고 검은 건반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높은 파고가 되는 소리의 거스러미 아래는 아래를 쌓고 위는 위를 쌓아서 비무장지대 같은 공중정원이 완성된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창..

한줄 詩 2022.01.30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 - 조장훈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요 근래 이렇게 몰입해서 읽은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독성이 있는 책이다. 강북에 살기에 강남 갈 일이 많지 않다. 예전에 직장이 강남에 있을 때도 대치동까지 갈 일은 별로 없었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 부동산 시세와 학벌 생산지의 중심지로 어떻게 대치동이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대치동에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처음엔 강사로 한때는 원장으로 또 한때는 진학 상담가로 수많은 학생과 부모들을 만났다. 대치동에 관해서 만큼은 빠삭한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글도 아주 잘 쓴다. 이 책은 아파트 시세 차익 정보나 어떻게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처세술 책이 아니다. 자기 개발서는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독파하고 나면 대한민국의 현실..

네줄 冊 2022.01.30

박수근 전시회 - 봄을 기다리는 나목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박수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지금까지 몇 번 박수근 작품전을 봤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전시는 처음이다. 봄을 기다리는 나목이라는 시적인 제목도 마음에 와 닿는다. 이번 전시회 제목처럼 박수근 하면 박완서 선생과 뗄 수가 없다. 전시장 곳곳에 박완서 선생의 흔적이 보이고 선생이 쓴 책도 함께 볼 수 있다. 네 개의 전시장을 돌고 나면 박수근 화백 인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박수근 화백은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가난한 형편에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고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다. 당시 미술계는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파가 주류였다. 박수근은 정식 학교도 나오지 않고 근본 없는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다. 그의 그림을 알아 본 외국인들..

여덟 通 2022.01.29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 이정희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 이정희 매운 연기의 아궁이로 몇 년 살다가 부글부글 끓는 밥솥으로 몇 년 살다가 다시, 솥뚜껑 들썩이는 화로 몇 년을 살았다 조리로 쌀알 일어 안치면 밥물이 자작자작 밥이 누룽지듯 속이 타고 입술이 타는 그런 시간들이 지났다 한 칸 한 칸 정량의 물이 소진되듯 무수한 반복으로 뜸을 들였다 그렇게 찔끔찔끔 물의 공간에서 불의 일렁거림을 거쳐 누룽지는 잔불의 시간 찬장 밑 막걸리가 식초로 발효되는 동안 두껍게 얇게 한 생애가 눌어붙는다 빈 아궁이로 식어가다 시커멓게 그을린 천정처럼 막막해지고 시래기처럼 햇살의 기울기에 뒤채는 그런 사람 어둡고 칙칙한 그 살강을 건너지 못하고 그을음으로 남은 사람 매운 연기도 없이 밥을 짓고 그을린 천정도 없는 눅지 않는 밥솥의 바닥 같은 그..

한줄 詩 2022.01.29

어느 친구의 죽음 - 박인식

어느 친구의 죽음 - 박인식 오래 못 본 친구에게 전화 넣었다 아내가 대신 받아 애 아빠가 지금 막 숨을 거둬,,,, 그녀 통곡에 깨어난 꿈 나는 곧 그 친구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을 기억해내 친구 아내에게 전화 걸었다 이번에는 아내가 아니라 죽은 친구가 전화 받더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죽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거기가 어디야 그때가 언젠데 이제야 전화하는 거야 친구의 놀란 목소리에 다시 깨어나도 여기가 어디인지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꿈 속의 꿈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뒤돌아보니 - 박인식 꼬마야 누가 불러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고 쇼윈도 유리창에 웬 백발 노인네만 비쳤던 고개 한 번 돌렸는데 일생이 다 흘러가버린 거기 여기는 할아버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꼬마의..

한줄 詩 202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