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쪽의 나이 - 김기리

마루안 2022. 1. 17. 21:57

 

 

서쪽의 나이 - 김기리

 

 

서쪽의 나이에서는 가랑잎 소리가 난다.

손으로 꼽아 보면

손끝이 시려 오는 저녁이 있다.

짚가리 냄새가 나고 검불 연기를 좋아하는 나이

서쪽의 나이에는 시린 등이 있다.

돌아앉아 있는 외면하는 방향이 있다.

 

서쪽의 나이를 서성이다 보면

발등이 시려 오고

환했던 겨울마다 흰 서리가 내린다.

은일자라 불리는 국화가 제철이다.

봄꽃은 놀이를 가야 제 맛이지만

방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국화는

서쪽 나이에 이르러

가꾸기 가장 좋은 꽃

 

동쪽의 나이들이 찾아들고

북쪽 나이로 두서너 걸음 들어섰음에도

남쪽 나이 이끌고 동쪽이나

서쪽의 나이로 살고 싶은 것이다

 

고독의 문패를 내다 거는 북쪽 나이

폐일언(蔽一言)하고

 

동서남북 네 갈래 나이를 한데 버무려 시루에 담아 푹 쪄서 절구통에 부어 놓고 떡메로 탕탕 쳐서 반질반질 예쁘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로 세모 네모 동그라미로 재미 있고 기쁘고 행복한 떡으로 지혜롭게 빚어서 먹고 싶은 날

 

피안의 담장 밑에

국화가 시들고 있다.

 

 

*시집/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어리고/ 문학들

 

 

 

 

 

 

그 여자전傳 - 김기리

 

 

계절을 겨울로 두고 살아서

머리카락이 희다.

시력이 훌쩍 가 버린 것은

삼십 중반에다 그 맑고 밝던 시력을 빼앗기고 왔기 때문이다.

크나큰 부엌을 안고 이고 살 때는

집 안과 밖 전부가 북적북적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시도 때도 없이 밥상을 편찬하였고

반찬의 목록을 수집 도감하였다.

부산하던 영역의 옷을 벗기가 무섭게

세월은 말도 없이 나를 떨쳐 두고

혼자서 훌훌 가 버렸다.

홀로 멍할 때면 간간이 생각이 찾아와

전화번호를 뒤적이고

쓸쓸함과 기쁨을 툭툭 친다.

웃을 때는 어린 날을 데려와 한참을 즐거워하고

눈물이 나와 울 때는

어디서 짠 소금물을 떠 와 상처에 붓는다.

 

석류 알 진홍색 붉은 혀들은 날마다 판을 치고

알알이 내뱉는 말들이

가녀린 마음 벽에 턱턱 박히던 시절

그래도 그렇게 쩍쩍 갈라지던 아픔마저도 한참 동안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가곤 한다.

 

적막이 진을 치고 있다.

창밖으로 눈을 돌린, 눈길에서 흘러나오는

머리가 희끗한 회한을 본다.

 

 

 

 

# 김기리 시인은 1937년 전남 구례 출생으로 조선대 교육대학원과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불교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래된 우물>, <내 안의 바람>, <나무 사원>, <달을 굽다>,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어리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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