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詩) - 우대식

마루안 2022. 1. 18. 22:43

 

 

시(詩) - 우대식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 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시집/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시(詩) - 우대식


시는 나를 일찍 떠난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내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灰)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 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펴면
가늘게 떨리는 정맥
그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시집/ 설산 국경/ 중앙북스


 

 

# 우대식 시인은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1999년 <현대시학> 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베두인의 물방울>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0) 2022.01.20
홀로 하루를 먹는다 - 오광석  (0) 2022.01.20
해당화 피는 마을 - 김용태  (0) 2022.01.18
서쪽의 나이 - 김기리  (0) 2022.01.17
꽃이라는 기호의 모습 - 강재남  (0) 2022.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