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마루안 2022. 1. 20. 21:37

 

 

눈, 이라는 세상 - 이윤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눈은 퍼붓고 쌓이고 나는 얼굴을 바꾸지 못한 지 오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지 오래
베개가 내 얼굴을 반쯤 파묻어버리도록
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당신이 내 생각을 하는 걸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은 지 오래
침대는 네 다리로 서 있거나 버티고 있거나
내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의 숫자만큼 눈이 내리고
고드름처럼 얼어붙어가는 나의 침대는 삐걱이고
다시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쏟아지고 퍼붓고 아우성치고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어왔다는 걸 모르지 않은 지 오래
우리는 한밤중에 깨어나 당황하며 모르는 척 눈을 감은 체
발을 숨기고 속눈썹을 떤다
누가 지금 당신 생각을 하는가
우리는 지금 누군가 우리가 되고 있는 걸 안다
사람에게로 뛰어드는 눈처럼
눈에게로 뛰어드는 사람처럼
우리가 보게 될 세상이 우리 자신이었다는 걸

 

 

*시집/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 문학동네

 

 

 

 

 

 

그 집 앞 - 이윤설


그의 무덤은 털모자처럼 따뜻해 보여요
그는 옆으로 누워 책을 뒤적이겠죠
남모르는 창이 있어
그리로 내다보기도 하겠죠 가을 오는 숲이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걸
턱 괴고 바라보겠죠
냄비에 밥도 지어먹고 빨래도 하고 둥근 천장에 닿지 않도록
고개 숙이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담배도 피울 겁니다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편지도 쓸 겁니다
남모르는 창에도 어둠이 내리고 그는 창가에 앉아 생각하겠죠
이렇게 변함이 없는 걸 왜 항상 두려워했을까
털모자처럼 귀를 가리는
혼자만의 방을 갖는 것인 걸 왜 그렇게 두려워 울었을까
양치질을 하며 발을 닦고 잠자리에 누울 겁니다
잠자리에 누워 코도 골겠죠 그의 습관이니까요
꿈도 꿀까요 죽는 꿈을 꾸며 가위눌리기도 할까요
그건 물어봐야겠군요
그의 무덤에 등을 대고 누우면
언젠가 그의 집 앞에 앉아 기다리던 때 같아요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그날처럼,
내가 온 줄 까맣게 모르고
그는 지금 저 안에서 세상모르게 낮잠 자고 있는지도 모르죠

 

 

 

 

# 이윤설 시인은 1969년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명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이 당선되었고, 2006년 조선일보와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다. 2020년 10월 1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누가 지금 내 생각을 하는가>는 그의 첫 시집이자 1주기에 맞춰 나온 유고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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