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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세컨드 - 장이모

간만에 참으로 감동적인 영화를 봤다. 극장에서든 넷플릭스에서든 상위권을 차지하는 영화는 죽고 죽이는 범죄 영화나 일단 웃기는 게 우선인 오락 영화다. 코로나에 살기도 팍팍한데 영화라도 재밌어야 한다면 동의하겠다. 이 영화는 장이모 감독의 최근작이다. 초창기 영화 만큼은 아니나 그래도 영화가 과연 어때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려준 작품이다. 영화제를 Film Festival이라 하지만 사진이든 영화든 요즘 필름으로 찍는 경우는 드물다. 훗날 필름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것을 관이 주도하는 시대에 집단 생활을 하는 주민들의 유일한 문화 생활은 영화 보기였다. 중국의 어느 소도시에 낯선 남자가 영화를 보기 위해 찾아 온다...

세줄 映 2022.02.10

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한줄 詩 2022.02.10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 정덕재 시집

나는 유행 따라가는 데에 젬병이다. 최신 휴대폰이 나왔다고 바로 달려가지 않는다. 심지어 새폰으로 바꿀 때도 한두 해 지난 구형 모델을 선택한다. 옷이나 구두, 시계 같은 패션 유행과 속칭 핫플이나 맛집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딱 최신 상품에 관심을 두는 것은 출판물이다. 지독한 활자중독자라고 할까. 단 하루도 시집을 펼치지 않거나 글을 읽지 않으면 밥을 굶은 것처럼 허전하다. 만 원짜리 점심 메뉴와 만 원짜리 시집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 시집을 집는다. 물론 굶으면서까지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김밥같은 싼 메뉴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관심 가는 책을 외면하지 않는다. 읽고 싶은 책을 사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으나 책 읽을 시간이 가난한 것은 맞다. 그동안 시간을 낭..

네줄 冊 2022.02.10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 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

한줄 詩 2022.02.09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톱니바퀴에 끼어 - 김추인 생체 시계는 누구의 의도된 프로젝트인가 크기나 두께의 정렬도 아니고 자동만도 수동만도 아닌데 내 몸의 시계를 조종하는 너, 누구냐 정밀하다 톱니바퀴들 맞물려 돌아가고 오차 없이 프로그램되어 시행되는 생체의 길 살의 톱니바퀴 뼈의 톱니바퀴 숨의 바퀴 피의 바퀴 내장은 내장대로 거죽은 거죽인 채로 내용물이 제 형태를 지키도록 살뜰히도 감싸 안은 가죽 자루의 책무 요즘 배설의 톱니바퀴 엇박자로 건너뛰어도 기동력 떨어져 좀 낡았거니 치부했을 뿐 이, 목, 구, 비 쓸 만하다 눙치고 버텼는데 일 났다 전두엽 쪽에서 보내오는 경고 메시지 깜박깜박 까물까물 긴가민가 우주의 톱니바퀴 무심히 돌고 있을 이 시간 나는 탕헤르의 바닷가에서 암고양이 그리자벨라의 '메모리'를 노래하고 있다 *시집/ ..

한줄 詩 2022.02.09

빛 바른 외곽 - 이우근 시집

시집 코너에서 시집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떤 중년 여성이 직원에게 묻는다. "선물 하려고 그러는데 요즘 잘 나가는 시집이 어떤 거죠?" 한쪽을 가리키며 직원이 안내를 한다. "여기에 진열된 책들이 잘 나가는 시집입니다." 가까운 곳이라 다 들린다. 직원이 안내한 코너는 흔이 메이저 출판사가 발행한 시집만 모아논 곳이다. 문학과지성, 창비, 문학동네 시집뿐이다. 그 시집들은 책장에 세워서 진열한 것이 아니라 앞 표지가 전부 보이게 바닥에 진열되었다. 타고난 아웃사이더인 나는 메이저보다 무명출판사 시집에 더 관심이 많다. 숨어 있는 시집 고르는데 관심을 두느라 곧 시선을 거뒀지만 잘 나가는 시집을 찾던 그 분은 어떤 것을 골랐을까. 모쪼록 좋은 시집과 인연이 닿았기를 바란다. 이우근 시집은 내가 찾은 보석 ..

네줄 冊 2022.02.08

인연이라는 것은 이처럼 유치한데 - 송병호

인연이라는 것은 이처럼 유치한데 - 송병호 눈썹에 쓸린 빗물을 손등에 훑는다 쉬 걷힐 것 같지 않다 물먹은 솜뭉치를 업은 소나기구름 시퍼런 칼날에 베인 폭포 창문 너머 얼비친 파전 굽는 뒤태, 비밀을 감춘 실루엣 어느 삼류 화가가 은소반에 흘린 보름달 같다 몇 순배의 잔과 짧은 혀끝 말 파전은 봉분 같고 달덩이 같고 고해하듯 성체의 단말기는 출구를 도모한다 꽃바람은 언제라도 넉넉하지 않다 얍삽한 조갯살 미궁으로 빨려 드는 가장 정직한 동질 급체에 바늘 찔린 외피의 화농 툭 떨어지는 저 붉운 꽃잎 (둘 사이) 이면의 계약서 같은 형식은 필요치 않았다 *시집/ 괄호는 다음을 예약한다/ 상상인 인연은 그냥 인연이었으면 좋겠다 - 송병호 인연이라는 것이 겉과 곁이 포개졌다 나뉜 하트의 반쪽처럼 상관의 결이 다르..

한줄 詩 2022.02.08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그 눈망울의 배후 - 복효근 가난한 이웃나라 어느 빈촌에 갔을 때 진열대에 싸구려 과자만 잔뜩 쌓여있는 허름한 가게 하나 있었다 헐벗은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이 애처러워 몇 푼씩 주려 하자 안내를 맡은 이가 돈을 주는 대신 가게에서 과자를 사서 한 봉지씩 쥐어주라고 했다 과자 한 봉지씩 쥐어주고 쓰러져가는 집들을 돌아보고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아이들 손에 들렸던 과자는 다시 거두어져 진열대에 놓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준 것이 독이었을까 약이었을까 내가 지은 것이 복이었을까 죄였을까 어느 하늘보다 별이 맑은 그 밤 끝내 묻지 못하였다 아이들의 머루알 같은 그 눈망울의 배후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입춘 무렵 - 복효근 혼자 살다가, 버티다가 딸내미, 사위들 몰려와서 가재도구 차에 나누어 싣고..

한줄 詩 2022.02.05

흔적 - 정덕재

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

한줄 詩 2022.02.05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어느 나라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그리워한 적은 있다 그럴 때 나는 태엽 감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태엽을 감다 보면 자꾸 무더운 여름이 왔고 아버지는 노을처럼 녹슬어갔다 엄마의 방은 온통 한쪽으로만 감겨 있었고 늘 열려 있어 좋았다 저녁이면 내 입에선 혓바늘이 돋아 하수구 있는 좁은 마당에 빙글빙글 비행기가 한 방향으로 잘도 돌았다 그 어지러운 기류를 타고 나팔꽃이 피어났다 장난감은 고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싫증이 나는 거라 생각했다 눈이 따가울 때 어느 먼 나라는 가까이 감겨 있었고, 옆집 담 끝에 걸려 있던 파란 감이 서둘러 붉어지면 아버지가 돌아왔다 고봉밥이 올라오고 며칠 동안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장난감은 바뀌었지만 아버지, 나는 말하는 장난이 필요해요 주..

한줄 詩 2022.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