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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의 달인 - 이현승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나는 무례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많고 사무적이며 세상에는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 어떤 급한 일도 덜 중요한 일로 만드는 능력을 신은 왜 그들에게 주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늑장 피우지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월이 짧은 것이 달력 기술자의 문제가 아니듯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가 빨리 가는 것도 아니며 슬슬 얼굴색이 삭힌 홍어처럼 되어가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들은 한 호흡으로 더 멀리 잠수하는 사람처럼 굴지만 다음 기회란 항상 꽝 뒤에 오는 것이라서 운 나쁜 사람은 철로에서 튄 돌멩이에 눈을 맞은 사람이며 벼랑 말고는 다음이 없어 참기 힘든 사람이다. 우리는 성공이 약속한 대로 찾아오지는 않..

한줄 詩 2022.02.22

견뎌야 희망이다 - 박지영

견뎌야 희망이다 - 박지영 하루 치의 노동이 환전되는 곳 넓은 펜스 안의 마당에서는 풀섶에 떨어진 민들레마저 씨가 되어 높은 고철 담장을 넘기까지 넝마주이와 숨어든 이웃들의 슬픈 이야기들이 거래되는 곳 매일 풀섶에 눕고 둑방 길 아래 개천에 별처럼 숨어 있는 먹이들을 찾아 새들이 훑듯이 아버지가 가난한 삶을 견디는 넝마주이들에게 희망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집/ 돼지고물상 집 큰딸/ 실천문학사 넝마주이에 대한 애상 - 박지영 매일 마주한 그들의 웃음은 비린내가 났다 잘못된 선택이 인도한 삶과 하루의 고단함 또한 그럴진대 꽃을 볼 여유도 없이 하루 종일 떠돌다 고물을 얻지 못하면 펜스에 마주한 채 오줌을 누고는 했다 지린 펜스를 지나며 꽃들을 보는 우리 남매는 코를 잡고도 꽃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그늘..

한줄 詩 2022.02.21

월간 현대시 2월호, 발견 시

#김춘수 선생의 그 유명한 시 의 첫 문장은 이렇다. . 맞다. 구구절절 맞다. 이번 달 현대시에 나온 시 중에서 김승희 시인의 시가 그랬다. 아무리 좋은 시를 발표해도 독자가 읽어 주지 않는 시는 의미가 없다. 친분 있는 시인들끼리야 서로 읽어 주고 빨아 주며 품앗이를 하니 넘어 가자. 생각보다 시인들이 남의 시를 잘 읽지 않는다. 그저 글거리 소재로 활용할 때뿐 자기 시에 취해 사는 사람들이다. 시 읽는 사람보다 시 쓰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써서 즐겁고 읽어서 괴로운 시 또한 얼마나 많던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에겐 관심 없고 오직 자기 차례에 부를 노래 찾는 것에 정신을 쏟는 것과 다름 없다. 이번 호에서 공감 가는 시 한 편 만나지 못하고 그냥 넘어 가나 했는데 김승희 선생의 시가 있..

여덟 通 2022.02.21

별것도 없는 봄을 기다리다니 - 박찬호

별것도 없는 봄을 기다리다니 - 박찬호 회양목 낮은 줄기 사이로 노란 꽃이 필 날도 이제 멀지 않았어 그때가 되면 봄도 오는 게지 겨우내 남극의 펭귄 떼처럼 서로의 등에 기대어 칼바람을 피하던 회양목은 그래서 항상 무더기로 자라는 게지 외롭지 말라고 낮고 작은 것들은 뭉쳐야 산다고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것들은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매해가 그렇게 스스럼없이 오고 또 가고 한겨울을 올곧게 이겨 낸 낮은 가지들에게 축복처럼 별빛이 내리는 밤 살아 있으니 보기 좋다 꿋꿋하니 대견하다 아직도 그렇게 함께 의지하니 눈물 난다 조금만 지나면 나아질 게야 이제 상원(上元)도 막 지났으니 정말로 봄도 멀지 않은 게지 그렇게 봄은 올해도 또 오려는 게지 분명 벚꽃이 필 무렵에 조용히 오려는 게야 그러면 분명 나아..

한줄 詩 2022.02.19

혼자 먹는 밥 - 김남권

혼자 먹는 밥 - 김남권 혼자 먹는 밥은 눈물이 절반이다 젓가락질 한 번 할 때마다 마주 앉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린다 싱거운 콩나물무침을 밥에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이던 순간 대학로 어느 분식집 귀퉁이에서 떡라면을 사주던 가난한 시절의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고춧가루를 털어 넣은 겨울 뭇국 한 숟가락 떠먹다가 앙큼하게 순결을 바치고 떠난 고 계집애가 떠올라 목이 메었다 평생 밥을 혼자 먹었지만, 생의 한 마디를 지나서도 여전히 혼자 먹는 밥은 그리움이 절반이다 김치조각 하나에도 왼쪽 가슴이 떨리는데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선홍빛 진달래 한 송이는 어쩌자고 눈 밑에 피어나 저 홀로 아롱아롱 눈물을 삼키고 있을까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시와에세이 페이스메이커 - 김남권 육십 평생을 눈 ..

한줄 詩 2022.02.19

나는 나답게 나이들기로 했다 - 이현수

사다 놓고 읽어야지 하면서 미루다 뒤늦게 읽은 책이다. 시간에 쫓기고 책 읽는 동력이 예전보다 떨어졌는데도 책에 대한 욕심은 꺼질 줄 모른다. 이 책에 대한 갈망을 언제쯤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어쨌든 이 책은 건강 에세이 읽듯이 흥미롭게 읽었다. 저자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읽어 가면서 여성임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 병원과 임상 현장에서 환자들을 접해온 심리학 박사다. 50 이후의 마음 가짐과 건강한 삶을 누리고 죽음을 대비하는 심리까지 꼼꼼하게 썼다. 누군들 나이 먹는 걸 좋아할까마는 저자는 늙어서 좋은 것 딱 하나는 지혜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주변의 노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지혜와 포용심이 느는 것이 아니라 심술과 고집이 늘어난다. 50대 끝자락인 나부터 보자. 저자는 조금..

네줄 冊 2022.02.19

길고양이 - 박숙경

길고양이 - 박숙경 어둠을 사랑한다는 말과 도둑이라는 누명의 말은 왠지 은밀히, 라는 말과 잘 어울리죠 눈물을 사랑해요 심심한 날이면 자음 모음을 허공에 던져 흩어진 낱말을 낚기도 해요 처녀자리에 영역 표시를 하는 건 우리들만은 아니죠 슬퍼질 때는 잘게 다져진 별빛으로 심장 한복판에 눈물의 뼈대를 그려요 본능은 잔인하기도 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기억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유죄라는 붉은 글씨를 가슴에 새기죠 벽과 벽 사이를 사랑해요 그림자들의 수군거림을 엿듣거나 바람의 목격담이 들려오면 우울해져 헛기침이 나요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몇 마디와 팽팽해진 밤의 감정이 손을 잡으면 어둠으로 깊어져 눈빛이 흐려져요 안개 같은 사랑을 꿈꿔왔어요 안개는 안개를 외면하지 않아요 나지막이 안개가..

한줄 詩 2022.02.18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

한줄 詩 2022.02.18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 심재휘

심재휘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그는 1997년에 등단했고 햇수로 25년이다. 그동안 다섯 권을 냈으니 5년에 한 권 꼴이라 비교적 과작인 셈이다. 하긴 10년 만에 시집을 내는 사람도 많으니 이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네 번째 시집에서 홀딱 빠졌었기에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4년 만에 나와 반가웠다. 시집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 , 다. 이전의 시집 으로 2019년 제1회 김종철문학상을 수상했던 시인은 이후 런던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인 그는 연구년을 맞아 한동안 런던에 체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런던에 관한 시가 여럿 실려 눈길을 끈다. 나는 2002년 12월 21일에 떠나서 2017년 5월 25일까지 15년을 런던에 살았다. 그 기간에..

네줄 冊 2022.02.17

밥집에서 - 이현조

밥집에서 - 이현조 곤드레밥집에서 차림표를 보던 아내가 어수리가 뭐예요 주인에게 묻는다 나물 중에 최고의 나물이죠 우문에 현답이다 주는 것만 먹다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다 맛난 것만 먹다가 몸에 좋다는 것만 먹는다 나물 중에 최고라는 말에 생전 처음인 어수리돌솥밥을 주문한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어머 이걸 어떻게 다 먹지 너스레를 떤다 당뇨와 심근경색을 앓던 아버지를 심장마비로 여의고 당뇨와 합병증을 앓는 엄마를 치매로 요양원에 모시고 중년의 나이에 깜박이는 기억력과 머리 어깨 무릎 발 허리 통증을 달고 사니 생긴 버릇이다 기왕이면 몸에 좋은 것이 최고여 천식으로 호흡기를 달고 살던 서방을 보내고 무릎 수술하고도 걷는 게 힘든 장모님 아픔으로 얼룩져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당부 자꾸만 배가 볼록해지는 딸..

한줄 詩 202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