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집으로 가는 길 - 오광석

집으로 가는 길 - 오광석 해가 미처 떠나지 못한 독산동 거리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공장 건물 뒤로 연붉은 석양이 칠해졌다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순례자들처럼 식당가로 걸으며 성스러운 풍경화가 그려졌다 그가 그림 속에서 서성였다 검푸른 점퍼에 손을 끼운 채 한 식당 앞에 박혔다 기계의 내일을 위해 윤활유를 부어 주는 일은 늘 그의 몸에도 적용시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항상 출근하는 길보다 짧았다 얼큰하고 경쾌한 귀가가 끝나고 좁은 원룸 속에서 지친 몸을 뉘었다 누워서 바라보는 원룸 창문은 커다란 캔버스 끈끈한 유화 같았다 그림 속에서 돌아온 그는 가위로 달을 잘라 반만 걸어 놓았다 나머지 반은 잘게 부숴 별 알갱이로 만들었다 어두운 거리 사방으로 달았더니 별 빛나는 밤거리가 되었다 거리에서 그는 늘 고..

한줄 詩 2022.02.16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나는 지구에 온 사람 지구에 와서 동사무소에 등록을 했고 지구에서 아내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 종일 중얼거리는 비를 만났으며 지구에 와서야 말없는 돌과 그보다 신중한 바위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는 만나는 것들의 연속 목청 큰 천둥과 가시 공을 나에게 던지는 너도밤나무를 만났다 등을 둥글게 말아 엎드려뻗친 후 폭포 위에서 발광하는 무지개와 나처럼 지구에 온 사람 몇을 은밀히 만났다 많은 별 중에 내가 떠나온 별이 밤새 저렇게 울어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요즘 아내는 나의 정체를 눈치챈 듯하다 저녁에 자세히 씻지 않았으며 돌아누워 새벽까지 정숙하다 그러나 나는 예서 사람이 된 사람 지구에서 잔뼈가 굵은 아내를 위해 나는 기꺼이 체류를 결심했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

한줄 詩 2022.02.16

굶주림, 가장 슬픈 일

좋은 잡지 시사IN을 보다 사진 한 컷에 오래 눈길이 간다. 아프리카 이야기다. 오랜 기간 비가 오지 않아 농사는커녕 초지 자체가 사라졌다. 환경 재앙이다. 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가축인들 오죽할까. 사진은 지붕의 볏짚을 벗겨 굶주린 가축에게 먹이는 장면이다. 세 마리 소는 저들에게 유일한 재산인데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굶겨 죽일 수 없어 지붕의 짚을 걷어낸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하다. 한쪽에서는 굶고 한쪽에서는 남아 버린다. 한국에서 버려지는 음식은 얼마일까. 가정에서든 식당에서든 먹다 남겨 버려지는 음식으로 처리 비용이 엄청나다. 그로 인한 환경 오염은 또 얼마나 심각한가. 산책 나온 애완견들도 비만으로 뒤뚱거린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이렇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지..

열줄 哀 2022.02.15

불편한 관계 - 최규환

불편한 관계 - 최규환 신형 휴대폰을 쓰게 되었다 손가락에 마비가 올 정도로 연습을 해도 세상의 편의를 따라가지 못했다 글로벌 뱅킹으로 가입해 외국인으로 살 뻔도 했다 다음 생은 집 나간 아내가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오거나 헤어지고 돌아오는 딸의 울먹임에 어쩔 줄 모르는 공중전화로 살고 싶었다 다음날도 그런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버릇에 길들여지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그때까진 이렇게 살아도 될 듯싶지만 안과 바깥 사이 그 너머를 꿈꾸는 덜떨어진 멍청이로 사는 게 좋아서 마음만으로 사는 일이 힘든 오후 세상을 앉히지 않은 오랜 누각처럼 둥둥 떠 있다가 네모진 무게 안으로 나를 넣어두려는 미련일지라도 어느 날 흐르는 강물의 찬찬한 넉살로 남고 싶어 행여, 라는 말에 ..

한줄 詩 2022.02.15

굴뚝새의 겨울 - 이우근

굴뚝새의 겨울 - 이우근 살아가는 한해 한해가 늘 겨울이었다, 뜨겁고 서러웠다 폭염이었다 여름이 오히려 추웠다 목도리인 양 구름이 부축해 주었다 소나기는 면도칼이었지, 아마 사는 이치가 극과 극에 맞닿아 그것이 음과 양의 스파크가 되어 에너지가 되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질기고 약해도 핏줄이 아님이 없으니 당한다고 뭉개지지 않으니 개똥밭에 굴러도 더욱 개똥이 되어 거름이 되고 흔적이 되어 뒷날 꽃잎이 되고 별이 될지 누가 알리, 파닥이며, 인간의 겨울을 견딘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고속도로 1톤 트럭들 - 이우근 죽어라 달리는 미끈한 차들 속에서도 제법 잘 달리는 작은 트럭들 보고 있으면 즐거워라 배추나 양파 마늘 기타 등등 양(量)으로 뭉쳐야 돈 되는 거 잔뜩 싣고 가끔 돼지나 소도 ..

한줄 詩 2022.02.15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 류흔 시집

출판사 서평과 해설을 보면 이 시집을 읽은 당신에게 경배와 존경을,, 어쩌고 나오는데 나는 경배까지 받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두꺼운 시집이 나왔어? 하는 탄성 정도랄까. 실제 시집 마지막 페이지 숫자가 548이다. 다섯 권 정도의 시집을 한꺼번에 묶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 세 보지는 않았으나 시집 해설에서 322편의 시가 실렸다고 한다. 보통 시집 한 권에 60편 내외의 시가 실리고 값도 1만원 안짝인데 이 시집은 1만 3천 원이니 실린 시편에 비해 저렴하게 읽었다는 위안 정도랄까. 나같은 쫌팽이 독자는 이 고귀한 문학 작품에 책값을 결부시킨다. 어쨌거나 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첫 시집부터 이 시인에게 관심이 있었다. 비교적 시적 호흡이 고르고 자기 만의 개성이 담긴 시가 인상적이었다. 류흔은 흔히 시..

네줄 冊 2022.02.15

주문진, 조금 먼 곳 - 심재휘

주문진, 조금 먼 곳 - 심재휘 강릉여고 근처에 모여 동기들이 자취나 하숙을 할 때 그녀는 이른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매일 통학을 했다 시내의 머스마들이 주문진 출신을 두고 나릿가라고 놀리던 날이 있었다 강릉과 주문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 세월을 따라 어떤 곳은 더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가까워져기도 했는데 명주군 주문진읍이 지금은 강릉시 주문진읍이 되어서 닿을 듯 닿지 않던 조금 먼 곳이 사라져버렸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은 아주 먼 곳 조금은 멀고 조금만 가까워서 닿을 수 없는 곳 머리에서 바다 냄새가 나던 그 여고생은 말 한마디 못 붙여본 그녀는 가물거리는 그날의 주문진 조금 먼 곳이고 먼 곳과 가까운 곳만 남은 이제는 조금 먼 사랑은 사라졌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

한줄 詩 2022.02.12

유행가들 - 김형수

시인 김형수가 쓴 유행가에 관한 에세이다. 저자는 1959년에 출생했기에 한국 유행가의 흐름을 제대로 경함한 세대다. 그러고 보니 1959년에 태어난 시인들이 참 많다. 베이비 붐 세대이긴 해도 유독 눈에 많이 띈다. 1958년 생인 누나 말에 의하면 한 교실에 70명쯤 되었다나? 유시민도 1959년 생이다. 구정을 전후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몇 권의 책과 시집을 읽었다. 밀린 숙제 하듯 미뤘던 책을 읽을 수 있는 연휴가 소중하기 그지 없다. 그리 두꺼운 책이 아닌데도 이 책을 읽으면서 속도를 내지 못한 이유가 있다. 책 속에 언급된 노래를 찾아 듣느라 무척 더디다. 궁금한 것 그냥 못 지나치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비교적 뽕짝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도 처음 듣는 노래도 있다. 유행가 역사에서 한국 생활..

네줄 冊 2022.02.12

방이거나 관이거나

입춘 지난 지가 한참인데 여전히 겨울 날씨다. 오늘은 바람이 불어 더욱 춥게 느껴졌다. 봄은 아직 멀었나 보다. 추운 바람이 불수록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진다. 건널목 앞에서 막 빨간불로 바꼈다. 이곳은 다음 파란불까지 오래 기다려야 한다. 지하도를 통해 건너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네모난 것을 무심코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누군가의 방이다. 이것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매일 헐었다 다시 만드는 방이다. 안에 누구 있어요? 부르고 싶어졌으나 말았다. 스마트폰에 몇 장 담았다. 지나가는 여자는 나를 구청에서 나온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술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면 모범 시민이다. 막 짓고 들어갔는지 주변도 깨끗하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리는 행복이 당..

다섯 景 2022.02.11

비행기가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는데 - 김륭

비행기가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는데 - 김륭 없는 것이다 하늘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혼자 사는 것이다 죽은 줄도 모르는 것이다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 어쩌다 발견해 줄 사람은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지만 죽은 사람마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 논다 가끔씩 배달되는 자연 한 박스를 열면 나오는 멸종된 새가 같이 놀자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혼자는 기어코 없는 것이다 밤이 없어서 달과 별을 만들 수 없고 낮이 없어 거울조차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되기 위해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것이다. 문득 하늘을 조금 남겨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혼자 사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본다 저런, 모기가 비행기 흉내를 내고 있다 ......쯧쯧 ..

한줄 詩 2022.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