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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 김광수 시집

요즘 이 사람 시에 빠져 틈 날 때마다 펼쳐보고 있다. 잡지 문학과경계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낸 시집인데 이름에서 보듯 중심이 아닌 변방에 있는 시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출판사다.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유명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시집도 재판을 찍는 경우가 드문 편인데 무명 출판사는 오죽할까. 출판사든 시인이든 돈 벌 생각보다 시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없으면 이런 시집이 지속적으로 나올 수 없다. 처음의 열정과는 달리 몇 권 내다가 얼마 못가 발행을 멈춘 출판사가 얼마나 많던가. 내 천성이 변방에 있어야 마음이 더 편한 아웃사이더라 이런 시집에 눈길이 가는 편이다. 는 김광수 시인의 첫 시집이다. 마흔이 다 된 2002년에 등단했으니 등단 15년 만에 첫 시집이 나왔다. 그래서 최근에 쓴 시보다 오래된..

네줄 冊 2018.01.31

복기(復碁) - 김광수

복기(復碁) - 김광수 혹여, 도리천 어디에라도 잠시 화생하여 이쪽 생애를 복기할 수 있다면 수미산 제석천 그물을 찢어내 증오와 자학, 비애 , 남루의 검은 돌 그림자는 버리고 취모검, 소요자재 유유자적의 정적으로 때론 딴전을 피우며 달빛 젖은 바둑돌을 함박눈처럼 뿌릴 것이다 비록 너의 돌이 내 숨통을 짓누르며 뒤통수를 찍더라도 둥근 돌의 무늬와 환한 달빛을 볼 것이며 나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비참하게 경멸하더라도 삼계육도 삼천대천세계가 노을 무렵 홀연 무너지는 아이들의 모래성 같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고 바둑판에 들어와 있는 바둑돌만큼의 우주와 바둑판 바깥 무량광대 경계를 오가며 한바탕 비천(飛天)의 춤을 꿈꾸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다 견딜 수 없이 허리가 아프면 마지막 돌을 던지고 깃털처럼 사뿐, 돌아..

한줄 詩 2018.01.30

소시민의 낭만 - 박순호

소시민의 낭만 - 박순호 칭칭 동여맨 생활이 유리창에 걸리었다 간밤에 버려진 이야기 목구멍에 걸려 여름몸살에 앓아 눕고 모래알로 밥을 안쳐 풀잎으로 김치를 담그는 즐거운 상상 부젓가락 같은 몸을 담요 한 장에 실어 허기져 헤어진 몸을 뒤척거릴 뿐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는 가난이 고마워 찔끔찔끔 눈물이 난다 나는 세상의 담벼락 하나를 품고 꼭꼭 숨어 살아왔다 허름한 골슬레이트 지붕 위 참새떼에게도 놓아기르는 똥개에게도 뚝방 비탈에 심은 호박과 옥수수에게도 한동안 터럭조차 보여주지 않았지 여름비에 호박잎이 넓어지고 옥수수알이 굵어질 무렵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개 밥그릇에 끼니를 채워놓고 시장에 가서 순대를 사먹는다 *시집,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문학마을사 신호등 - 박순호 새벽을 담아 풀칠해버린 ..

한줄 詩 2018.01.30

깨어 있다는 것 - 김윤환

깨어 있다는 것 - 김윤환 ​ 양계장에 밤새 켜 있는 백열등을 보고 주인에게 물었다 닭이 잠들면 알을 낳을 수 없다고 깨어 있어야만 알을 낳는다고 대답했다 깨어야 알을 낳는다는 것, 깨어 있어야 생명을 낳는다는 것, 참 가혹하면서 경이롭다 가혹한 새벽 무렵 한 알의 생명이 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이 세상에 왔을지 몰라 살아 있음이란, 무정란의 깊은 잠 그 경계선에서 불면의 가혹함을 견뎌내는 것, 기어이 결가부좌를 틀고 알을 품는 것이 아닌가 *시집,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시와에세이 사즉생(死卽生) - 김윤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이야기했다 박정희가 죽고 박정희를 말하고 김대중이 죽고 김대중을 말한다 사람은 죽어서야 제 말을 듣는다 사람은 죽어서야 제 점수를 받는다 예수의 사람 바울도 자아가 ..

한줄 詩 2018.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