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 속의 산책 - 김신용

마루안 2018. 1. 31. 22:51



구름 속의 산책 - 김신용



한때, 나는
우주의 주민이 되는 것이 꿈인 적이 있다
제 흐르고 싶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막힌 곳 없이 흐르며
내가 살던 양동 빈민굴 사창가도, 공중정원처럼 거닐기를
얇은 베니아판으로 칸막이를 한, 그 더러운 판잣집의 이불 속에서도
몽유처럼 잠들기를, 꿈꾼 적이 있다


그 골목에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개밥바라기처럼 돋아나던 여자들,
빈민굴의 어둠을 저질 화장품처럼 바르고, 달맞이꽃처럼 돋아나던
여자들을 보며,
언젠가 어느 외국 영화에서 본 창녀처럼
내 인생은 나의 것, 이 삶도 나의 삶이라며
돈으로 내 몸을 살 수 있어도, 나를 살 수는 없어요. 하고 세련된 눈웃음을 흘리며
지금 나를 잠시 빌려줄 수는 있어도, 나를 줄 수는 없어요. 하고 당당하게 선언하며
몸을 팔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욕은, 몸에 걸친 남루가 아니었다
우리가 가 닿지 못할 구름 신발을 신고, 구름 속을 거니는 것이었다


그때,
공원의 벤치에 내리던, 노숙의
비는
병균이었다
전신을 파고들어, 몸 속을 텅 비워버리는
그런 바이러스였다


그 병균에 감염된 몸은
기아 의식의 온상이었고, 지독한 공항장애증의 숙주였다
 

모든 것을
독화(獨化)시키고, 자석화시키던
그 비,
세상의 모든 쓸쓸함을 빨아들여, 고통만을 섬처럼 떠올리고
비참함만을 벤치에 앉혀 놓던
그 비에 젖어서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텅 빈 몸이므로, 버릴 것도 없다고 중얼거리던
그 때.



*시집, 환상통, 천년의시작








불알 두 쪽 - 김신용



꿈을 꾸고 나면 더 허기가 져,
아무리 둘러봐도 허물어져가는 집, 때묻은 사람들
더러운 빈민굴 벌집 동네의 이 작은 방, 마치 관 속 같아.
이 무덤 속의 시체로는 나 혼자로서 충분해,
삼십 년 노가다 생활에 너에게 줄 것이라곤 몸밖에 없어.
골병이 쥐새끼처럼 들락거리는 이 텅 빈 집,
허망의 송곳니에 갉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무거운 등짐에 짓눌린
등뼈와 무릎 관절통,
이제 맑은 날에도 무시로 붉은 신호등을 껌벅거려.
몇 백만 원짜리 혼수는 고사하고, 너에게 구리반지 하나 끼워줄
여력이 없어. 치솟는 전셋값을 보라고, 이 골방의 방세마저 껑충거려.
내 거북이의 일당으로는 라면마저 맘 놓고 먹일 자신이 없어.
남들이 뭐라는 줄 알아? 죽으면 썩지도 않을 거래. 날 보구...., 왜냐구?
하도 라면만 먹어 방부제 처리가 되어 있어서래. 우스워? 미라처럼
방부제에 공업용 유지로 기름포장까지 된 이 몸이 우스워?
그래도 꿈을 꾸었어. 내 등의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밝아오는
세계를.
땀방울 불 켜고, 공순이 너, 지친 육신이나마 뉘일 수 있는
방 한 칸을.
그러나 잠 깨면 흔적 없이 쓸려가는 모래의 집,
가슴에 칼을 품었어. 저 물신이 넘쳐나는 도시를 향해
강도가 되고 싶었어. 사람의 얼굴을 벗고, 개기름 흐르는 기형(畸形)의
탈을 쓰고.... 정말
꿈을 꾸고 나면 더 허기가 져! 너에게 줄 것이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그 불알 두 쪽,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세요? 그것은
불의 알이에요. 불의 알—.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 시인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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