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의 낭만 - 박순호
칭칭 동여맨 생활이 유리창에 걸리었다
간밤에 버려진 이야기
목구멍에 걸려 여름몸살에 앓아 눕고
모래알로 밥을 안쳐 풀잎으로 김치를 담그는
즐거운 상상
부젓가락 같은 몸을 담요 한 장에 실어
허기져 헤어진 몸을 뒤척거릴 뿐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는 가난이 고마워
찔끔찔끔 눈물이 난다
나는 세상의 담벼락 하나를 품고
꼭꼭 숨어 살아왔다
허름한 골슬레이트 지붕 위 참새떼에게도
놓아기르는 똥개에게도
뚝방 비탈에 심은 호박과 옥수수에게도
한동안 터럭조차 보여주지 않았지
여름비에 호박잎이 넓어지고
옥수수알이 굵어질 무렵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개 밥그릇에 끼니를 채워놓고 시장에 가서
순대를 사먹는다
*시집,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문학마을사
신호등 - 박순호
새벽을 담아 풀칠해버린 편지 한 통
간절함을 접어 곱게 붕했으나 늘 채워지지 않는
단단한 껍질로 감싸인 청춘
봄비에 부풀어오른다
버림을 받아도 끝까지 아름다꼬울 수 있을까
주소 따라 떠나버린 마음이여
젊다는 것은
버려야 할 것을 과감하게 놓지 못하고
붙잡아야 할 것을 모질게 놓아버리는 걸까
분주한 건널목
나는 빨간불로 꽂혀진 채
늘 기다리기만 하던 우체국 계단에서
젖은 종이에 편지를 써 보내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를
잊어간다
그러나 봄비에 나의 허리가 연해지고
정해진 시간이 아닌, 때가 차면
세상의 모든 길이 녹색불을 밝히리라
떨어져 나간 껍질 자리가 가려워
새 잎이 움터 오르는 쪽으로 머리 숙여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수원과학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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