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친구야, 혼자서 가라 - 최금진

마루안 2018. 2. 1. 19:27



친구야, 혼자서 가라 - 최금진



속편하게 가라,
느타리버섯 같은 암세포가
네 항문을 다 파먹고 내장에까지 뿌리내렸다니
자식 걱정, 와이프 걱정 하지 말고
용감하게, 대한민국 육군하사답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진격하듯이
그렇게 가라,
나이 서른여덟이면 피는 꽃도 지는 꽃도 아니지
스무평 전세아파트와
현금 이천만원 남겼으면 됐지
가늘게, 가늘게라도
네 외아들에게 원주 전씨 24대를 넘겨줬으면 됐지
아프다고 돌아누워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고
내가 병실문을 꽝 닫고 돌아서서 나온 것처럼
미련 두지 말고
그깟 생명보험 하나 못 들어둔 거
입을 거, 먹을 거, 다 못 누렸다고 원통해하지 말고
저 밤하늘에
곰팡이 포자처럼 둥둥 떠서
혼자 가라,
주섬주섬 짐을 싸서 이사다니던 그날처럼
저승길 외롭다고 누구 데려갈 생각 말고
돌아보지 말고
살아서 지겨운 가난,
너 혼자, 너 혼자서, 다 끝내고 가라



*시집, 새들의 역사, 창비








단풍의 사상 - 최금진



절제된 참선의 광기가 산속에 절을 세웠겠죠?
내가 절간에 그려진 단청의 울긋불긋함에 대해 말할 때
동행하는 스님은 너무 젊어서
비범한 구석도 없이 그저 웃는다
한무리의 시든 단풍이 뻘건 각혈을 토하며
계곡에 엎드려 있을 때
등 탁탁 쳐주며 그만 자신을 용서하라고 말해줄 만한
깨달음이 없으므로
나도 그만 웃는다
마을 저 아래에서 폐비닐들이 바람을 타고 올라오고
해발 800고지까지 떠오른 힘에 대해
나는 아무 말 못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는 것과
스님들의 빡빡 깎은 머리는 비유적으로 같은 건가요?
나보다 열살은 젊은 스님의 웃음은
나보다 열살은 행복할까
행복한 건 죄가 아닐까,
단전에 힘을 모으고 아랫도리를 단련하는 불상들은
연꽃을 깔고 앉아 있고
연꽃은 만개한 여성의 성기와 유사하죠,
스님들도 자위를 하나요?
나는 관음과는 먼 관음만을 생각하고
섹스나 술이나 담배가 없어도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행이면
차라리 산을 내려가야 옳지 않을까, 물었지만
아무 사상이나 의지가 없이
개울에 둥둥 떠내려가는 단풍잎만 가리키는 스님은
그런 면에서
식물 혹은 식물인간의 상태를 지향한다고 나는 말했다
젊은 스님은 걸음이 빨라서
자꾸 뒤를 돌아보며 나를 기다리지만 그러나
인연이 닿아도
지긋지긋하게 깨달음만 남은 세상에선
다신 만나지 말자고
나는 인사했다
단풍을 데리고 하산,
마을에 닿는 도로변 낭떠러지에 서서
마지막으로 한바탕
절벽과 뜨거운 정사나 나누다 가겠다고,
나는 스님더러 부디
잘 죽으라 했고, 스님은 나더러 부처를 이루라 했다
둘 다 웃었다





# 최금진의 시는 불편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불편하면도 술술 읽히는 것을,, 그의 시를 읽고 나면 마치 단편 영화 한편을 본 것처럼 뒷덜미가 뻐근하다. 인생에서 견딜 만한 상처를 몇 개 간직하고 사는 것도 좋겠다. 늘 깨어있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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