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그리고 백 년 동안 - 여태천

그리고 백 년 동안 - 여태천 횡단보도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우체통 앞에서 안절부절 마음도 함께 점멸한다. 어둠이 번지고 은행나무 아래로 오래전에 지나갔거나 지나가야 할 얼굴들이 쌓인다. 표정을 되찮은 이들은 두 갈래 길로 은행잎이 되어 하나둘 떠났다.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일은 없을 거다. 마주 보지 못한 사랑은 냄새를 피웠다. 그리고 백 년 동안은 평범한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행의 열매들은 믿음이었다가 두려움이었다가 불안이었다가 결국엔 독이 되었다. 점멸하는 신호등이 모든 기억을 어지럽혔다. 돌아와 우체통에 머물고 있을 어둑어둑한 그리움에 대해 생각하는 저녁이다. 은행의 열매들이 우는 저녁이다. 누군가 그 마음을 훔치는 저녁이다. *시집, 스윙, 민음사 구멍 - 여태천..

한줄 詩 2018.03.11

하늘로 띄우는 부고 이은심

하늘로 띄우는 부고 이은심 잡은 손을 가만히 놓고 여든 해 살아 내린 자리 거두십니다 가도가도 춥기만 했던 당신의 마지막 호사스러움이 한 줄기 햇빛으로 따사로운 산 자들의 마을에서 그만 자자 자자 이천서씨애하지묘로 분가해 가는 날 창이 없는 방 하나 마련합니다 애초에 곁을 주지 않는 게 죽음이라 한 몸 누일 단칸방입니다 당신 가슴 철렁이며 숯검정이 되어갈 때 나는 철없이 출렁이며 떠돌았으므로 휘파람이나 붑니다 마른 나뭇가지 뚝뚝 분지르는 휘파람이나 붑니다 당신의 그 나라로부터 돌아온 사람은 하나 없으니 이후로는 아무도 당신의 안부를 묻지 않겠으며 누가 참나무 뜨끈한 불을 지펴 첫 밤에 드시는지 골짜기엔 저녁 이내 자욱하고 행여 먼저 돌아와 계실까 왈칵 열어 본 빈방에서 나는 오늘 참으로 만만한 이름 하나..

한줄 詩 2018.03.11

동행 - 김윤배

동행 - 김윤배 너는 젊은 날의 미친 듯한 삶을 말하며 내 잔을 거부했다 나의 설렘은 서녘 바다로 지는 붉은 해 때문이었다 가슴으로 차 오르던 서해 바다를 두고 나는 소멸을, 너는 생성을 생각했다 그 간극이 생명의 순환을 넘어 불화로 온다 그래서였을까 술잔에 잠기는 바다를 두고 나는 격렬한 기침을 했다 가슴속 개펄처럼 펼쳐진지 오래고 더러운 침묵들이 기도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바다가 올라와 있던 창에 어둠이 차는 동안 술잔에는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붉은 꽃들은 바다를 밀어내고 이미 저버린 꽃숭어리들이 썰물 진 해안을 붉게 물들인다 밀고 써는 바다, 또는 생성과 소멸을 두고 해안의 침묵은 더 오래고 견고했다 *시집, 부론에서 길을 잃다, 문학과지성 남행 - 김윤배 해송 사이로 꿈이 먼저 달려..

한줄 詩 2018.03.11

빨간 잠 - 천수호

빨간 잠 - 천수호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헌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아름다움은 저렇게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오래 흔들린 가지 끝 저기 저 꿈속인 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그녀 그녀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저 고운 가루에는 - 천수호 화장터까지 따라왔지만 저 고운 가루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밀가루 같기도 하고, 화장분(化粧粉) 같기도 한 그것은 고열(高熱) 속에서 너무 많이 ..

한줄 詩 2018.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