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와유거사(臥遊居士)를 위한 변명 - 황원교

마루안 2018. 3. 22. 13:27


와유거사(臥遊居士)를 위한 변명 - 황원교



누워선 천리

앉으면 삼천리니

일어서면 구만리 밖도 한 눈(目)이리라



비록 드러누워 비벽한 삶을 연명하지만

봄바람에 복사꽃 날려 오는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다


설사

죽은 뒤에 지옥불로 시달린다 해도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천국이다


누워서 생각만으로 천리를 오가니

앉는 순간 삼천리를 내다볼 테고

일어서면 단숨에 구만리도 달려가리라는 결기(決起)를

어느 누가 돌을 던질 텐가


누우면 천리,

앉으면 삼천리 밖으로 단숨에 달려가는

이 마음을



*시집, 오래된 신발, 문학의전당








오래된 신발 - 황원교



1


날이면 날마다

거리로 들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

드럽게 흙을 묻히고

재수 없게 똥도 밟아보고

비 오는 날엔 물웅덩이에도 풍덩 빠져보고

빙판에선 꽈당 미끄러져도 보고 싶은

오래된 신발 한 켤레.

24년째

흙 한 톨 묻혀보지 못한 채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 들고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발에 신겨 있다고 다 신발인가

제 발로 길을 걸어가야

제대로 된 신발 노릇을 하는 게지

죽기 전에 한번쯤은

뒤축으로 땅바닥을 질질 끌거나 못도 쾅쾅 박으며

지치도록 걷고 싶은 나의 신발,

마비된 사지(四肢)를 싣고

흰 구름처럼 둥둥

땅 위를 떠다니는 꿈이여!



2


오래전에 죽은

할아버지는 짚신을 버렸고

어머니는 흰 고무신을 버렸고

지난겨울

막내 동생도 현관에 구두 한 켤레 벗어놓고 영영 떠나버렸다

나도 언젠가 너를 버려야 하리

대문 밖 허공 속으로 길게 난 발자국들이

저렇게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 황원교 시인은 1959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강원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경추손상에 의한 사지마비영구장애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시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입에 마우스 스틱을 문 채 창작에 몰두했다. 1996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00년 계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빈집 지키기>, <혼자 있는 시간>, <오래된 신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