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이테 - 이강산

마루안 2018. 3. 21. 22:08

 


나이테 - 이강산

 

 

간판 찌그러진 식당이라면 어디를 가든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 여자의 나이테가 그려진다


얼굴이 쥐 파먹은 고구마껍질 같어, 원 없이들 잡숴....


어떻게 꽃 피고 단풍 들었는지
알 만하다, 몸통 어디쯤 벌목당했는지
상처가 깊은지 아물었는지
어느 방향으로 나이테가 기울었는지


너희도 자궁 들어내고 집 떠나봐라 고향이 뭔지 새끼가 뭔지 생각이 뒤집힐 것이여....


모란시장 변두리에서 삼겹살불판을 닦던 큰누님처럼
그 여자, 생의 절반쯤 떠돌았을 게다


알 만하다, 어느 골목엔가 잘못 들어섰다가
양철지붕 고드름이나 찢어진 봉창 따위를 발견하곤
갈 길 놓치고 오늘까지 눌러앉았을 게다

 


*시집, 물속의 발자국, 문학과경계

 

 

 

 

 

 

근시 - 이강산

 

 

간판의 글씨들이 먼 산처럼 흐릿하다

먼 산만 바라보고 살아온 듯한

하루 아침, 놀랍게

 

시력이 떨어지면서 한 발짝씩 다가서는 풍경이 늘었다

탱자 꽃 속의 가시를 발견한 것도 지난 봄이다

아파트중고차원고청탁서

한때 깃발처럼 내 삶의 풍향을 가리키던 욕망과

사소한 분노까지

 

창 밖 영구임대아파트 광장에서

밤새 비틀거리는 뽕짝들, 그 적막한 소음의 끝

노정상금지구역을 확보하기 위한 미명의 난타전을 본다

하루 이틀이 아니다

산다는 게 저렇듯

아홉 평짜리 목숨끼리 멱살을 휘어잡는 일인가

내 시력의 가시거리가 의심스럽다

어둠이 깊어서야 윤곽이 뚜렷해지는 산의 능선

그 능선을 달려온 듯한 사십 세가 되어서야

풍경의 뒷모습을 본다

잠길 듯, 가까스로

눈 좁혀 뜨는 법을 익힌 뒤에야

 

 

 

 

*시인의 말

 

......(앞 부문 생략)

누군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발끝에 매달아놓은 것처럼 언제나 낯설기만 한 나의 그림자, 나를 가장 닮은 듯한 그림자를 쫓아 먼 길을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