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동백, 대신 쓰는 투병기 - 박후기

마루안 2018. 3. 20. 19:57



동백, 대신 쓰는 투병기 - 박후기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계절에 대해 생각해
가을에 태어난 아버지는 가을에 죽었고
봄에 태어난 형은 봄에 죽었지
부지불식간, 꽃 피는 순서는 있어도
꽃 모가지 떨어지는 순서는 없다지


묘역을 공원이라 부르니
죽음이 더욱 친밀해지더군
동백 무덤, 언땅을 파지 않아도
죽음은 꽃 구덩이에 파묻히지
바다로 가는, 걷고 싶은 죽음의 둘레길
산다는 게 죽음의 둘레만 빙빙
돌다 가는 일인지도 몰라


사랑은 피어나는 순간
종말이란 걸 알아야 해
그러니 서로 살 섞기 직전까지 간직해온
붉고 짙은 설렘만 주고받기로 하자
우리 언제나 사랑의 도입부에만 머무르며
아, 꽃 피기 직전의 떨림으로 추락을 맞이하자


언 땅 위에서 자고 일어나면
봉오리가 부어올라 눈을 뜰 수가 없어
얼굴에 화색이 돌지 않는다고 걱정하진 마
꽃이 색을 기억하는 건
얼굴 표정이 그대로 여물어서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야


다음 생의 겨울엔
곱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면
흐릿한 연기와 함께 훅, 하고
불이 피어오르는 그런 저녁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어
집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밤,
불안과 다투는 시간이 짧았으면 좋겠어


한때 떨어진 꽃잎을 주워 담아
소쿠리 가득 내게 주던 엄마는
이제 소쿠리 하나 가득
박하사탕을 담아 내게 건네주지
세상에 아름다운 요양원은 없어
툭, 하고 지나간 세월
바람의 보조금에 매달려
겨우 목숨 부지하는 시든 꽃들
얼음장 위에 버려진 꽃들에게
혈색을 묻는 안부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문 열지 않으면 문밖은 없어
문 열지 않으면 너밖에 없어
문 열지 않으면,
문을 열지 않으면


그러니까
징그럽게 눈 뜨고
힘닿는 데까지 살아야 해
부탁이야



*시집, 격렬비열도, 실천문학








술래와 순례 - 박후기



창백한 유령들을 싣고
순환선 기차는 지하를 돌고 돌다
다시 무덤으로 돌아오네


밤,
지하 을지로입구역


영하의 세상 등지고
을(乙)자로 누운 사람들
신문지에 착 달라붙은 채
귀밑으로 흘러내린 어둠
머리끝까지 끌어당기네


두번 다시
들키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고
어떤 이는 아주
눈을 감아버리지만,
죽음의 술래에게
들키지 않을 인간은 없다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레일 위에 드러누운
순례자의 잠이여,
막차와 함께 순장되는
순례의 종말이여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과 길과 밥 - 김장호  (0) 2018.03.21
낮달 - 조재훈  (0) 2018.03.21
다시 그 봄날을 - 윤석산  (0) 2018.03.20
무반주의 사랑은 쓸쓸하다 - 김이하  (0) 2018.03.20
당신이라는 시간 - 서안나  (0) 201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