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어둠을 향한 성급한 질주가
목이 메이도록 두려워 질 때
더는 가벼워 지지 않는
한 순간의 숨이
굴욕적으로 느껴질 때
그곳으로 갔었다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은
낮은 지붕의 작은 성에선
감귤색의 불빛이 새어 나와
지친 발목의 뻑뻑한 허기까지
슬며시 휘감아 주곤 했었다
피지 못한 청춘의 혈흔을 돌보며
그 많은 우회와
그 많은 좌회를
맑은 소주의 흔들림으로 펴내면
아득한 절망도 잠시 둥글어 지곤 했었다
시간이 빼앗아 간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잡은 손이 공허해져도
이상하게 슬퍼지지 않던
그 성을 빠져 나와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내딛어야만 했던 나는
무거운 질주가 두려워
체한 어둠을 게워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겨울
낮은 지붕 안에서
절망과 나누어 갖던
투명한 수음을 그리워 한다
*시작동인 제7시집, 항생제를 먹는 오후, 들꽃사랑
항생제를 먹는 오후 - 박인숙
시대를 되밟아도 그렇다
거침없는 구호가
한 시대를 뚫고 나와
썩은 땅위로 버섯처럼 올라섰지만
그 생명의 원리에 의해
허물어지곤 했다. 봄날도
부산하게 쏟아지는 오후
쏟아져도 갈 데 없는 인생도 그렇거니와
무참히 떨어져도 여물지 못하는
이 땅의 노래는 더욱 우울하다
결빙된 어느 시절에도
제목을 얻지 못해 서성이고
옛 집에서 오는 교신을 해독하느라
주머니 속에선 식은 땀이 난다
여물지 못하여 흔들림을 바로 주는
이 땅이
내게 주는 언어들의 모호함으로
오늘도 항생제를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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