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마루안 2018. 3. 21. 22:50

 

 

그 겨울 낮은 지붕의 기억으로 - 박인숙

 

 

어둠을 향한 성급한 질주가

목이 메이도록 두려워 질 때

더는 가벼워 지지 않는

한 순간의 숨이

굴욕적으로 느껴질 때

그곳으로 갔었다

담장 밑에 웅크리고 앉은

낮은 지붕의 작은 성에선

감귤색의 불빛이 새어 나와

지친 발목의 뻑뻑한 허기까지

슬며시 휘감아 주곤 했었다

피지 못한 청춘의 혈흔을 돌보며

그 많은 우회와

그 많은 좌회를

맑은 소주의 흔들림으로 펴내면

아득한 절망도 잠시 둥글어 지곤 했었다

시간이 빼앗아 간

신데렐라의 무도회처럼

잡은 손이 공허해져도

이상하게 슬퍼지지 않던

그 성을 빠져 나와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내딛어야만 했던 나는

무거운 질주가 두려워

체한 어둠을 게워 버리곤 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겨울

낮은 지붕 안에서

절망과 나누어 갖던

투명한 수음을 그리워 한다

 

 

*시작동인 제7시집, 항생제를 먹는 오후, 들꽃사랑

 

 

 

 

 

 

항생제를 먹는 오후 - 박인숙

 

 

시대를 되밟아도 그렇다

거침없는 구호가

한 시대를 뚫고 나와

썩은 땅위로 버섯처럼 올라섰지만

그 생명의 원리에 의해

허물어지곤 했다. 봄날도

부산하게 쏟아지는 오후

쏟아져도 갈 데 없는 인생도 그렇거니와

무참히 떨어져도 여물지 못하는

이 땅의 노래는 더욱 우울하다

결빙된 어느 시절에도

제목을 얻지 못해 서성이고

옛 집에서 오는 교신을 해독하느라

주머니 속에선 식은 땀이 난다

여물지 못하여 흔들림을 바로 주는

이 땅이

내게 주는 언어들의 모호함으로

오늘도 항생제를 먹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