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당신이라는 시간 - 서안나

마루안 2018. 3. 20. 19:16



당신이라는 시간 - 서안나



가장 가까운 사람은 가장 멀리 있는 사람
상처는 상처를 이끌어 낸다
상처를 껴안으니 마음이 깊어진다


머리 감으며 전화벨 소리에 귀 기울이던
찬물 뚝뚝 떨어지던 계절


이마에 재를 묻히고 나는 사랑의 서책(書冊)을 덮었다
젖어 드는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한다


노트에 나뒹굴던 파탄의 고백들
나는 내가 싫다
당신은 구름처럼 날아오르는 비승비속의 캄캄한 우주
해독될 수 없는 이별로 세상은 높고 쓸쓸하다


월요일의 당신은 멀리 있고 수요일의 나는 낯설다


얼굴을 감싸면 낮에도 젖은 별이 뜬다
당신이라는 계절이 잠시 다녀갔다


반어법처럼 고요하다
손바닥이 젖은 이번 생(生)은



*시집, 립스틱 발달사, 천년의시작








이별의 질서 - 서안나



간절한 얼굴을 눕히면 기다리는 입술이 된다


한 사내가 한 여자를 큰물처럼 다녀갔다 악양에선 강물이 이별 쪽으로 수심이 깊다 잠시 네 이름쯤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피가 당기는 인연은 적막하다


당신을 모르는 것은 아직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육체가 육체를 끌어당기던 그 여름 당신의 등은 짚어낼 수 없는 비밀로 깊다 꽃은 너무 멀리 피어 서러움은 뿌리 쪽에 가깝다


사랑을 통과한 나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비애 우리는 어렵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내가 놓아 보낸 물결 천천히 밀려드는 이별의 질서 나는 당신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한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당신의 흰 무릎뼈가 만져진다





# 서안나 시인은 1965년 제주 출생으로 1990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 <플롯 속의 그녀들>, <립스틱 발달사>가 있다. 다수의 동시집과 평론집도 있다. 깊은 사유가 담긴 밀도 있는 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