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마루안 2022. 2. 26. 21:39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겨울이 끝나 갈 무렵

바지를 꺼냈고

허리는 두꺼워졌고

종아리는 가늘어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걷겠다며

마음먹었더니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심장은 헉헉댄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숨이 가빴던 시절이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숨소리와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흔들리지 말자는 혁명의 노래와

공장 굴뚝의 연기와

갈아엎는 배추밭이 어울려

심장이 뛸 때가 있었다

3층 계단만 올라도

숨이 가쁘다

허리띠 한 칸 때문에

콩당거리는

심장의 체면은 온데간데없다

계단은 높고

박동은 초침보다 빠르다

 

심장은 왼편에 있지만 반 뼘 정도 좌우로 움직일 때가 있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덧대어진 키스 - 정덕재

 

 

안경 쓴 가수 이상우가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을

불렀을 때가 1991년

어느새 30년이 지났다

 

2백 미터 전에도 알아볼 수 있었고

골목을 나오지 않아도

향기로 알 수 있었고

내딛는 발걸음은 까만 단화였다

 

30년 동안

다섯 번쯤 스쳤어도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립다거나 추억의 손끝이 떨린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백내장 때문이거나

노안이거나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얀 목덜미를 간간이 드러내던

눈부신 머리카락을 잊은 건

잊힌 것이다

 

그날 밤 깊은 키스로 남은 골목은

덧대어진 키스로 바랜 지 오래됐다

 

화장품이 가득 진열된 올리브영 가게를 찾아

달콤한 립밤을 고르는 동안

정체불명 향기에 갇혀

시람과 사랑을 한꺼번에 잊어벼렸다

 

 

 

 

*시인의 말

 

누군가 마중을 나온다면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낯선 사람이든 낯익은 사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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