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물도록 - 박수서

마루안 2022. 2. 26. 21:32

 

 

저물도록 - 박수서


사는 일이
스스로 저버린 꽃밭에 앉아 꽃수를 놓거나,
수몰된 가계의 지붕 위를 날아오르는 텃새처럼
이앙기가 삼키고 뱉어버린 모판처럼
남겨진 추억에 우물쭈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련 때문에 운명으로 떠나간 열망 저 편을
일몰이 긋고 간 심장의 붉은 두근거림은
저녁이 오면 해가 지는 일처럼 말없는 풍경이던지,
오래된 애인과 먹는 말 많은 밥상이면 좋겠어
제법 큰 눈이 내렸고 무거워진 가로수 쇠골처럼 내려앉은
나는 바라보는 일보다 지켜보는 일이 한창이야 
앞질러 뛰어가는 세월의 넓적다리를 자세히 보면 알잖아
바라보는 눈은 때때로 삶을 짓눌렀던 단단한 근육을 먼저 알아보지만
지켜보는 눈은 오금이 저리도록 기어이 견뎌왔을 힘줄을 읽잖아
하여 지켜보는 눈은 사랑에 더 가까운 생명체야 
눈 녹은 후 말끔해진 나뭇가지처럼
잦은 희망이 소곤거려 귓불이 말랑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져 
사는 일 별거 있냐고 다독이다 서럽게 멀어지는 태양의 굴절된 빛도 슬프다 하늘을 바라보니 덜컥 어두워졌네   
아, 겨울도 저물려고 해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꽃이 피어서/ 문학과사람

 

 

 

 

 

 

뜬장 - 박수서

 

 

싸움 개를 가둬 놓은 철조망을 들여다보면

구름이 울상이 되어 겨울비를 가락국수처럼 꽂는다

때를 기다리는 일은 계절과는 상관없는 일,

그저 스스로를 그곳에 보내려 끙끙대는 일

무릇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기다림의 종착에 이르기보다

연착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

땅 위에 떠 있는 석쇠처럼 숭숭 발가락이 빠지는 바닥에서 

사육의 신탁으로부터 철조망을 겨우 벗어나는 날은 기껏해야

동족의 목덜미를 물어뜯어야 할 운명이나

그조차 쓸모없어지면 사람의 밥이 되고 안주가 되어야 할

개도 분명 삶을 알고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이란 불판은 너무 뜨거워서

두께를 헤아리지 못하고 올려놓은 고기처럼 타버릴 수 있어라

아차 하고 헛생각이라도 하면 쉽게 델 수 있어라

당장 끝내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더디게 끝내고 싶은 것

그것이 기다림에게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자세,

개나 사람이나 딱히 다를 게 뭐가 있으려나

목줄에 길게 질질 끌리지 않고 삶을 오래 지탱하려 하는 건 한 가지

따듯한 바람이 더덕더덕 들러붙은 개털에 엉켜 노루궁뎅이처럼 박힌다

뜬장 위로 해가 뜨고 입춘이 왔다

 

 

 

 

# 박수서 시인은 1974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박쥐>, <공포 백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해물짬뽕 집>, <갱년기 영애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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