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喪家는 아늑하다 - 김응교

喪家는 아늑하다 - 김응교 딱 한 번 전화로 통화했던 후덕한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한다 방 가득 둘러앉아 무거운 무게를 견디는 꺾인 표정들 비스듬히 노을빛 받아 귤빛으로 물든다 한 사람의 임신한 유부녀와 대여섯 총각들이 둘러앉아 상가인지도 잊은 채 탄생에 관해 얘기한다 한꺼번에 쌍둥이 낳으면 좋잖아? 지금 욕하는 거예요? 푸푸 웃으며 죽음과 친해진다 자정이 넘어 장기전에 돌입할 전사들만 남는다 웅크린 짐승마냥 귀가하는 먼 걸음들 샐녘까지 몇몇 문상객만 다녀가겠지 몇 패로 갈라 밤을 때우고 셀프서비스로 냉장고 속속 끄집어내며 똥배만 키우는 거북스런 보름달 매슥한 기억을 게우거나 신문지 뒤집어쓰고 뒤척이는 노곤하게 물러가는 어둠 기우뚱 졸고 있는 喪主의 등허리에 고인이 남긴 후일담이 어슴푸레 번져 오고 아기..

한줄 詩 2018.06.08

반짝임에 대하여 - 김선우

반짝임에 대하여 - 김선우 순천만 겨울 갈대숲 바람 속에 웅성거린다 가녀린 몸집의 도요새떼 갈대숲 가장자리 차가운 진펄에 내려서서 바람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뼝대처럼 펼쳐진 북풍의 정면, 사소한 신음 한줄기 새어나오지 않는 민물도요 고요한 얼굴들 조그만 한뼘 키에 삼생(三生)을 눌러앉힌 면벽 나한들 같다 바람의 마음을 읽기 위해 오래 기다려온 입선(立禪)의 새떼 마침내 날아오른다 모든 각도에서 낱낱이 다르게 반짝이는 정면을 기억하는 측면의 날갯짓들, 순천만 한 허공이 갈꽃 무리처럼 반짝인다 저마다 다른 음역으로 바람을 허밍하는 갈대의 꿈을 부리에 물고 모두 다 다르게 읽은 바람의 마음속으로 비상!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눈 그치고 잠깐 햇살 - 김선우 지저분한 강아지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한줄 詩 2018.06.08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 김종수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 김종수 한때는 뜬금없이 묻곤 했지요 날 진짜 사랑해?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디딘 곳이 사라지는 시간의 계단을 오르다 보니 이젠 삶 자체가 그런 언어를 잊어버렸군요 날 사랑해? 묻지 말아야 할 것 아무리 물어봐도 답이 없는 것 속 뻔한 질문이지만 이젠 왜 그 질문조차 잊혀지는 걸까요 생(生)의 바람이 쉼 없이 세월의 등을 떠미는 게 안타까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그냥 가슴에 묻어야겠어요 그대를 아는 만큼만 안다는 건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겠지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는 거 아니겠어요 *시집, 엄니와 데모꾼, 달아실 명절 테러범 - 김종수 처음엔 안 그랬는데 옛날엔 설렘도 있었는데 육십이라고 누구나 다 귀가 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육십갑자 돌고 나니 명절..

한줄 詩 2018.06.08

그때 이후 - 김이하

그때 이후 - 김이하 그대의 눈을 보듯 목련을 바라본다 저 솜털 부숭부숭 한 꽃의 부리를 들여다보며 한참도 지난 겨울의 한 자리 찾는다 봄은 지척인데 무슨 소리냐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았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기에 내 인생의 한 점은 언제나 불안하게 흔들리며 꺼져갔다 그리곤 어느 자리에서 주저 앉아 먼 하늘 바라보면, 문득 깜빡 잊었던 단지 속의 엿가락처럼 달콤하게 떠오르는 기억, 우리는 가끔 이런 걸로 살지 않는가? 정말 잘 나가던 시절도 정말 뜨겁던 시절도 정말 죽고싶던 시절도 다 잊혀가고, 아련한 한 가닥 아지랑이 같은 그 눈빛 찾아 시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대의 눈을 보듯 목련을 바라본다 언젠가 화들짝 피어 있을 첫눈 같은 그대, 목련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대의 눈에 가득 들어오던 첫눈 내리..

한줄 詩 2018.06.08

보내지 못한 편지 - 김광수

보내지 못한 편지 - 김광수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배신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너를 사랑하는 천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가 미워서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생존에 순행하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저열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를 더 사랑하거나 내가 더 아픈 것이 차라리 사랑이려니 했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너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그러면 네가 더 아플까 봐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후회 - 김광수 내 몸이 아직 살아 있어 이마트에서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원추리 새싹 돋는 공원길 걷네 백목련 피어있고 진달래 피려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봄에, 나는 발에 잘..

한줄 詩 2018.06.07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tarot 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겨울은 왔다 날린 눈보라가 입천장까지 들이치는데 심장을 뒤덮고 있는 열대야는 도무지 멎을 기색이 없다 열두 달을 거치고도 이르지 못한 집 열두 번의 죽음을 통과하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너를 기만하며 채우려던 소망은 어느새 나를 기만하기 시작했고 생은 끝내 되돌려 받는 고통이 되고 있다 모든 기쁨과 슬픔이 전생과 내생이 늘 사소한 오해의 공식과 손잡고 있다고 聖木들 눈 깊도록 일러주던 말 나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잎사귀도 꽃잎도 없이 가지마다 붉은 참회를 품은 시간들은 모두 너에게로 가는 내 살과 피의 바탕이다 붉은 하늘로 걸어 나가 삶과 죽음의 혼례를 마치고 나는 한 그루 나무로 남으려 하는가 그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

한줄 詩 2018.06.07

그리운 뒤란 - 권덕하

그리운 뒤란 - 권덕하 내 몸에는 모른 체해 주는 뒤란 있어 눈물이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낙수에 패인 자리 바라보는 일은 밀려난 풀만큼이나 자신을 달래는 일이었고 댓잎 만지작거리며 바람 쐬기도 하고 손톱만큼 자란 수정도 보고 숨겨둔 일 고백하듯 까만 꽃씨 받다가 텃밭으로 나가 지붕 내려다보며 고욤이 그렇듯 떫은 것도 풀덤불에 두어 그리운 것 되면 상강 지나도록 표해 놓은 삭정이만 봐도 좋았는데 뒤란 사라진 몸 정처 잃고 잦은 슬픔에 먹먹하다 금간 오지그릇처럼 철사로 동이고 싶은 마음 조금씩 뒤틀리고 붉은 혀 감출 데 없이 시드는 것도 꽃대궁의 일로만 남아 신경이 쓰이다 *시집, 생강 발가락, 애지 빈집 - 권덕하 집이 전화받고 싶을 때가 있다 의자나 식탁도 귀 기울이다 모서리 질 때 있다 혼자 살다 무너..

한줄 詩 2018.06.07

노인 - 김상철

노인 - 김상철 단걸음에 오를 인도 스무 걸음에 오르려나보다 택시는 문도 닫지 못하고 차도는 밀려 난감한 운전자들 본다, 임종을 지키는 눈으로 더러는 과거로 돌아가 활력 넘쳤던 팔다리를 생각하고 더러는 미래로 달려가 저들 앞길을 가늠하는데 삶은 회의적이거나 적어도 한숨이다 그렇다 노인은 십대가 이십대로 성장하고 이십대가 삼십대를 배워가고 그리고 또 오십대가 육십대로 늙어가듯 다음에 나 있는 길을 향해갈 뿐 지금 인도로 오르고 있는 한낮의 고요한 정물 저것은 떠나려는 비애가 아니라 생의 완성을 위해 타는 막바지 혼신의 정열이다 *시집, 흙이 도톰한 마당에 대한 기억, 고두미 4차선 도로를 건너는 아버지의 영상 - 김상철 초록 신호등이 점멸을 시작하자 멈춰 있던 자동차들이 흐를 태세를 갖추었다. 횡단은 아직..

한줄 詩 2018.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