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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과 유서 - 허혜정

뇌물과 유서 - 허혜정 뇌물,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약된 운명이 아니었던가 울컥 쓴물이 넘어와도 멀쩡하게 뭐든 갖다 바쳐온 이 비굴한 손가락을 짖이겨버리고 싶다 투덜투덜 내주던 유리컵도 내던져버리고 싶다 언제나 소파에 주저앉아 나의 피로를 잔인한 오락처럼 즐기던 얼굴 잘 하면 편의를 봐주겠노라는 느끼한 혓바닥 독거미처럼 거미줄을 치는 피곤한 호출 자존심을 통째로 요구당한 순간을 내 손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짙은 코팅창이 달린 세단을 몰고 가는 평판 높은 그들을 커튼 뒤에서 지켜봤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정치꾼들처럼 조용히 의자를 바꿔앉고 힘을 틀어쥐는 걸 왜 세상은 코앞의 일만 빼고 거창한 뉴스만을 떠들어대는가 제 코앞에 흐르는 뇌물에 대해서는 입을 닦는가 그러나 세상은 내..

한줄 詩 2018.06.08

그리운 시절 - 서영택

그리운 시절 - 서영택 아무도 그 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았다 블록 담 열두 가구가 사는 집 늙은 쥐와 새끼 쥐가 그늘과 햇빛을 몰래 드나들고 담장 널린 햇빛에 홑청이불을 널었다 대문 밖에는 연탄재가 쌓인다 어디선가 된장 끓는 냄새, 좁은 한 뼘 그늘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골목길에 종을 흔들고 회전목마가 왔다 아이를 업은 새댁들 수다가 벌어지는 동네 뉴스 스튜디오 간밤 생긴 일에 손뼉을 치고 듣는 여자들의 어머, 어머 눈동자가 커진다 이웃들이 주소 대신 붙여 부르던 정든 별칭, 열두 가구 집 큰소리 한번 없이 정붙여 살았다고 청춘 시절이었다고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을까 *시집, 현동 381번지, 한국문연 잡초 - 서영택 1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 우리는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무교동에서 낚지복음..

한줄 詩 2018.06.08

숨결이 나를 이끌고 갔다 - 이필형

올해부터 고국 산천을 걷기로 마음 먹었는데 겨우 두 번 다녀왔다. 지리산 둘레길 한 구간과 백두대간 한 구간이다. 한 번 출발하면 사나흘씩 시간을 내야해서 계획을 세웠다가고 막상 떠나려면 이런저런 일이 생겨 미루다 보니 시간만 흘렀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틈틈히 시간 나는 대로 북한산 둘레길과 한강변을 하루 종일 걷기도 하지만 좀 더 호젓한 길을 오래 걷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이 책은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데 큰 일조를 했다. 여행책을 좋아하긴 해도 막상 읽으려면 유명 관광지나 맛집 탐방 위주여서 흥미가 떨어진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철저하게 고독한 길을 혼자 걸은 저자의 내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다롭게 골랐는데 읽어 가는 동안 그 길에 동행한 기분이다. 이 책을 쓴 이필형은 1958년..

네줄 冊 2018.06.08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앞에 다리를 벌린 여자 또 딸이었다 들일 때나 낼 때 지울 때에도 같은 자세인 이유 산부인과에 누워 생각한다 여와도 하와도 다리를 벌리고 싶었을까 가이아도 가시나들처럼 치마를 걷고 오줌을 누었을까 따뜻하고 둥근 방 꽃길 속으로 나비 한 마리 팔랑 날아간다 고요한 세계가 진저리친다 태초의 길들 새로 깨어난 통증을 기억한다 비누 때문이었나 욕탕 가득 싱싱한 오이 냄새 공중목욕탕에서 늙은 여자들 시든 오이꽃 같은 젖꼭지 정성스레 닦는다 돌아앉아 밑을 씻는다 세세만년 이러했을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자세가 남는다 폐경의 어머니 아이 하나 낳아달라신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처용엘레지 - 허은실 여기 잠든 짐승 나의 이승이구나 그러나 본디..

한줄 詩 2018.06.08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

한줄 詩 2018.06.08

시래기 - 육근상

시래기 - 육근상 바람벽에 시래기 타래 길게 늘어져 있다 물 기운 빠져 걷기 힘겨운 엄니 왼다리 같다 되똥거리며 해종일 다랑이 밭 일구고 콩잎 따고 수수목 꺾던 손등도 이제 장작 같구나 그 손에 자란 나도 장작 같아서 젖은 손등 문질러 온기 집어넣는데 얼마나 길게 연기 빼어 무는지 매운 눈물이 시래기 타래로 떨어져 바특하게 끓여놓은 찌개 같다 시래기 같은 몸으로 바람벽 기대어 엄니 보고 있자니 까치밥 파먹고 달아나는 새 떼처럼 나는 지금껏 엄니 파먹고 살아온 것 아니냐 물 기운 빠져나간 왼다리가 인두 자국처럼 붉다 *시집, 절창, 솔출판사 낙화 - 육근상 한마디도 없이 길다 다시 돌아가려니 가슴 먹먹해진다 초입에 쪼그리고 앉아 경배 중이신 엄니 다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일흔넷 되셨다 돌아가야지 ..

한줄 詩 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