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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목 - 이자규

매화목 - 이자규 마당에 매여 있는 병든 개의 신음이 하얀 눈발로 쌓여지던 겨울 비명처럼 다가드는 수묵으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봄이 나를 잊었는가 싶었을 때 묶여 있는 자유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 부르는 밤마다 내 안에서 울부짖던 짐승을 달래며 진눈깨비 아팠던 붉은 옹이마다 내 음계를 안고 그대에게로 가는 길 하르르 떨어지기 직전의 소리 없는 찰나 낙화의 전율을 빌려 푸르러지는 매실의 꿈 내 터질듯한 그리움으로 당신의 내부에 푸른 둥지를 틀 것입니다 *시집, 우물치는 여자, 황금알 개 - 이자규 고깃덩이로도 개를 달래진 못한다 갓 낳은 새끼들을 떼어놓자 살 맛 잃은 듯 허공 향해 낑낑거린다 하늘 밖과 땅 밑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끈 개새끼가 된 오늘 구십 년 살다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스스로 ..

한줄 詩 2018.06.06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오랫동안 써왔던 가면에 금이 갔다 10년 이상을 잘도 버텨주었다 모두들 이 가면을 믿고 일을 맡기고 술잔을 나누었다 어떤 사내는 그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모른다 수선집 사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늘 여분을 챙겨두세요. 가면에 금이 가는 상황은 빗방울만큼이나 많습니다. 수선은 낡은 것을 좀 더 유지시켜줄 뿐입니다. 소수의 취향일 뿐이지요. 수선이 제 직업이지만, 제 것 모두를 수선하지는 않습니다. 3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킨 비결이죠."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일정한 속도로 가면을 수선하고 있는 사내가 깨달음의 스승처럼 존경스러워졌다 가면이 수선되는 사이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던 형형색색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

한줄 詩 2018.06.06

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 - 유기택

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 - 유기택 바람 소리가 밤새 물소리 같아 무엇이 아니면서 자꾸 떠내려갔지 그래야 할 것 같았지 돌아누울 때마다 모서리가 배겼어 내가 그렇게 많은 모서리인 걸 알았어야 했을 것 같아 날 선 모서리들이 뭉그러지고 슬그머니 둥글어지고 있었던 거야 바람 소리가 잠을 끌고 다녔지 뭐가 자꾸 가슴팍께서 덜컥거렸어 *시집, 참 먼 말, 북인 뿌리들이 하는 거라곤 줄곧 - 유기택 가라앉은 막걸리 같은 데를 새끼손가락으로 휘저어보는 일 뿌옇게 들고일어나는 갑갑증을 무소식 대하듯 들여다보는 일 감감한 꽃 걸음마다 꼭, 그 흐린 델 찍어서 맛을 보고서야 직성을 푸는 일 허리께가 뻐근한 봄날마다 짐짓 허리 짚고 서서 하늘에다 대고 중얼거려보는 일 괜한 혼잣말도 자주 올려다보는 일 손닿지 않는 데가 더 ..

한줄 詩 2018.06.06

객실 열병 - 김익진

객실 열병 - 김익진 죽을 수 있도록 태어난 우리는 살아있는 한 헤어지는 중, 햇살에 휘감겨 부서지는 터치 빅뱅 후 몇 번의 클라이막스 오르가즘 후 남아 있는 것은 바람의 허밍과 주파수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 창가를 스치는 한순간의 삶은 딱 한번 반짝이는 울림 폐허가 되기 위해 세워진 도시에서 태어나 유령이 되기까지 우리는 객실 열병을 앓고 있다 순간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바람은 야생이고 베어지는 우주의 현이다 삶의 의미와 존재는 언제나 정밀하게 계산된 중력의 전략 마지막 터치로 부서지는 바람의 허밍과 주파수가 애도 없이 사라진다 *시집/ 기하학적 고독/ 문학의전당 소각된 상처 - 김익진 방아쇠를 당기기엔 너무 먼 과녁 꿈꾸는 차원의 한 단계 위에서 한 장씩 말하기엔 많은 사연이 있다 겉으론 평화로우나 소..

한줄 詩 2018.06.05

홀로 마당에서 - 남덕현

홀로 마당에서 - 남덕현 -K에게 봄꽃 다 지고 초여름 비 그러나 여름꽃 아직 멀고 봄꽃 그림자마저 지는 슬픔만 남았습니다 풀빛 이토록 밝았던지요 달 없이도 환한 마당에서 아는 노래 벌써 다 부르고 이제 모르는 그리운 노래 쓸쓸히 홀로 지어 부릅니다 떠나온 사람보다 떠나보낸 이 많다 돌아올 사람보다 떠나갈 이 많다 바람에도 내가 두고 온 바람이 있어 유난히 서럽게 머리카락 나부끼며 스쳐 가듯이 나는 당신이 두고 간 사람 밤마다 낡은 허공의 탯줄을 끊고 나는 유성인 양 당신의 별자리를 유난히 반짝이며 스쳐 떨어집니다 몇 번 울고 웃은 것이 전부인데 벌써 우리가 헤어져 이승과 저승에서 늙습니다 하염도 없이 여념도 없이 우리가 따로 늙습니다 *시집/ 유랑/ 노마드북스 그리움.1 - 남덕현 마른 노을에 번개 치..

한줄 詩 201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