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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거리 - 김해동

빛의 거리 - 김해동 할머니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별에서 태어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 별에서 살다가 죽으면 또 다른 별에서 태어나고 그렇게 수없이 죽어서 끝없이 태어나다 보면 우리의 영혼은 우주 끝가지 갈 수 있을까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는 1초 조금 넘게 걸리고 태양까지는 500초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지구까지는 2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랴 아침마다 달려오는 이 빛이 2백만 년 전 안드로메다 자리에서 달려온 것이라면 안심하라 너의 죽음마저도 안심하라 천당과 지옥마저도 광활한 빛의 대지에 쏟아버리고 영원의 시간이 보내준 이 빛과 함께 무수한 영혼들이여 빛의 거리를 믿고 사랑하라 *시집, 비새, 종문화사 결혼식 - 김해동 성당에서는 ..

한줄 詩 2018.06.04

극락조 염전 - 최준

극락조 염전 - 최준 인부들이 잠들어 있는데 거품 파도를 일으키며 선풍기가 돌아간다 어디에도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소금 창고 그늘 찾아들어 소금자루 베고 잠든 인부들의 꿈속에서 극락조가 우는 한낮 주인공 없는 비극이다 소금을 먹지 않는 극락조는 숲 없는 바다에서 살지 않는다 적도를 오래도록 서성거리는 붉은 태양뿐 태양의 바다와 눈부신 개펄뿐 그늘 없는 극락이 어디 있다고 인부들이 버려 둔 삽날이 소금보다 더 반짝거린다 지난 우기의 천둥과 번개가 몸 도사리고 한낮을 이미 기운 그들의 삶이 저물어가듯 고집스럽게 선풍기가 돌아간다 인부들의 꿈 없는 극락조 없는 소금창고가 바다의 깊이로 넓어져 있다 바람이 분다 선풍기는 소금을 낳지 않는데 소라고동의 먼 휘파람 소리로 극락조가 울고 있다 극락조 은빛 울음만 눈부..

한줄 詩 2018.06.04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지붕 위 붉은 선인장 꽃은 며칠째 떨어지지 않았고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캄캄해져버린 안부만 왔다 예리한 가시를 키우던 선인장은 죽을힘을 다해 뾰족해지는 법을 물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얀 나비를 꽂은 소녀에게로 갔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수직만을 고집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어서 더 아프다 꼿꼿한 가시 속에 숨겨놓은 손바닥만 한 잎보다도 꽃잎을 포기 못하는 선인장보다도 물어볼 수 없는 전갈인 너와 쓸 수 없는 답장인 나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이 계절과 저 계절의 경계에서는 언제나 계절보다 먼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것을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무릎이 시리다는 것을 지붕 위를 맴돌던 붉은 달이 소리 없이 졌다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한줄 詩 2018.06.03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먹지 못하면 개꽃, 반반치 못하면 개떡, 시원찮으면 개꿈이다. 어엿한 새끼도 개를 앞에 두고 욕을 보인다. 남의 족보를 허락 없이 가져가서 개망신 주는 꼴이니 개로서는 어처구니가어벗다 할밖에.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 출신이 개수작 부린다고, 개똥도 모르면서 병나발 개나발이라고 닦아세울 것 같으면 개구멍이 다 그립고, 있지도 않은 개뿔로 창피를 주니 개 낯짝도 붉어질 지경이다. 저들끼리 남남하다가 새판 짜고 이판사판 몰려 딴판 벌리더니 개판이란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란다. 개 말로 죽이라도 한 술 떴으면 덜 억울할까. 개소주 대러 개장수 나서는 인기척이 이보다 슬플까. 당겨진 개줄 같은 긴장이 이보다 싫을까. 털레털레 마을돌이 나설 때면 개나리 푸지게 늘어서서 개털끼리 좋은 봄이..

한줄 詩 2018.06.03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장미를 꽂았던 꽃병이 깨졌다 깨진 조각마다 사탄의 요염한 옆얼굴이 새겨져 있다 날마다 나는 잔걱정을 갈아주었을 뿐 멈춘 적 없는 그대 순수 속으로 한 뼘도 들어가지 못했다 늑골 아래, 수없이 돌아서며 많이 운 곳 한 덩이 주먹밥처럼 뜨겁게 뭉쳐있던 추억이 욱신거리며 흘러나가고 누가 나 몰래 나를 불 지펴 어느 하루 일 만 송이 황홀히 타오르던 4월 지나 6월 다만 지금 이윽히 날 저무는데 흩어진 아픔을 쓸어모아 내 한 때 뭉클했던 그 가슴으로 먼저 서 있으면 이 세상 아니듯 그대 그저 피기만 하라 스스로 베인 손을 감싸 안고 더욱 살아갈 무슨 이유가 있어 바닥을 치는가 이 눈부신 파편 무릅쓰고, 지상의 어디 한 군데인들 꽂힐 곳 없을 때 꽃은 진다 그러다가 지는 것조차 그친다 *..

한줄 詩 201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