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마루안 2018. 6. 7. 21:33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tarot 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겨울은 왔다
날린 눈보라가 입천장까지 들이치는데
심장을 뒤덮고 있는 열대야는
도무지 멎을 기색이 없다

열두 달을 거치고도 이르지 못한 집
열두 번의 죽음을 통과하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너를 기만하며 채우려던 소망은
어느새 나를 기만하기 시작했고
생은 끝내 되돌려 받는 고통이 되고 있다

모든 기쁨과 슬픔이
전생과 내생이
늘 사소한 오해의 공식과 손잡고 있다고
聖木들 눈 깊도록 일러주던 말
나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잎사귀도 꽃잎도 없이
가지마다 붉은 참회를 품은 시간들은
모두 너에게로 가는 내 살과 피의 바탕이다

붉은 하늘로 걸어 나가
삶과 죽음의 혼례를 마치고
나는 한 그루 나무로 남으려 하는가
그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깊고 푸른 물길에 귀 기울이려 하는가

한껏 웃어라
처형받는 세상의 사랑들아
발목을 옥죈 밧줄은 질긴 인연의 뜨거움이다


*시집, 숨은 연못, 세계사

 

 

 

 

 

 

바보 이야기 - 박주하

-tarot 3

 

 

오래 묵은 시간으로부터 그대는 쉼 없이 걸어왔다

깃털로 만들어진 의복은 너무 먼 시간을 달려오느라 남루해졌는데

폐지 위에서 지도를 읽고 말없이 꽃잎의 배후를 맴돌며

지난한 생을 한바탕 축제로 가장하고 있구나

그곳으로부터 눈보라처럼 날아왔던 것은

혹 전생에서 누락된 그대 사랑의 증거는 아닐까

그대의 닫히지 않은 정수리는 여전히 하늘에 닿아 있고

하늘 또한 그대와의 교신을 끊지 않고 있으니

말해다오, 전생에서 누락된 그대 짙푸른 날갯짓에 관하여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기까지 비밀만을 한껏 품은

그대 발목에 묶인 은유와 환유의 요령 소리에 관하여

듣는 자 없고 묻는 자 없어서

어느 고생대의 전언인지 받아 적지 못하는 바람의 웅얼거림이

그대에게 먼 길을 재촉하기 전에  
부디 말해다오, 지친 나그네여
날아온 힘만으로 제 몫을 다한 듯
오늘도 대합실에 묵연히 잠겨 있는 육신이여
쉼 없이 공중 부양하는 슬픈 영혼이여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원색 - 박시하  (0) 2018.06.07
보내지 못한 편지 - 김광수  (0) 2018.06.07
그리운 뒤란 - 권덕하  (0) 2018.06.07
너의 향기를 어찌 견디겠니 - 고재종  (0) 2018.06.07
노인 - 김상철  (0) 2018.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