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삼원색 - 박시하

마루안 2018. 6. 7. 21:54



삼원색 - 박시하



슬픔 없는 참혹이 사거리에 서 있다

어제의 모래 기둥을 껴안는다

버스가 시립병원 앞에 선다

슬픔이 노선을 벗어난다

바퀴가 쿨럭쿨럭 공회전 할 때

사랑이 사라지며 나타난다

죽은 혁명의 살점이 오늘의 다리 사이로 떨어진다

'아직도'라며 사이렌이 울린다

순간마다 영원을 던진다

손가락으로 모래알을 부순다

내일 위에 머리카락을 뿌린다

마른 눈꺼풀을 가진 그림자를 감는다

서로 닮지 않은 우리들이

한 쌍의 눈물처럼 춤을 춘다

내가 너의 뼈와 가죽을 가르고

무릎을 꺾으며 걸어 나온다



*시집, 눈사람의 사회, 문예중앙








백만 송이 장미에 붙인 비밀 - 박시하



엄마, 당신에게 전화를 걸면

백만 송이 장미는 왜 그렇게 서럽게 피어날까요?


버스가 나를 그 골목에 내려놓았어요

저녁이어서 깊고 어두웠지요

닫힌 문 앞에서 울고 있을 때

우르르 하수구로 쓸려가는 핏물 번진 눈동자들


듣고 있나요 엄마, 

아낌없이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백만송이 장미가 정말 필까요?

당신을 닮은 나의 자궁에도 백만 송이 그 장미 피어날까요?


당신은 오랫동안 내게 사랑의 기술*을 가르쳤지요

긴 저녁을 거슬러 푸르러진 장미의 나날,

내가 삼켰던 백만 개의 꽃잎이

백만 개의 우물 위로 떠오르고 있어요


엄마, 비밀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왜 모든 슬픔은 배꼽에 고일까요?

내 딸이 탄 버스가 그 깊은 골목에 당도하려 할 때

당신의 울음 속에 물결치는

그 꽃잎을 타고

우리 이제 그립고 아름다운 나라로 갈 수 있나요?



*서가에 꽂혀 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이 부분에 엄마는 밑줄을 쳐두었다.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시인의 말


약한 것은 강하다.

이름이 없는 것은 불리기를 원치 않는다.

다만 나를 부른다.

슬픔의 자식처럼.

슬픔에게서 떠나면서도

떠나간 슬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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