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풍으로 - 한명희
-지천명을 등에 업고
몸 여기저기 불다 만 풍선처럼 물집이 나 있다
눈 부릅뜨고 봐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시를 쓰던 당신은 모래밭에 집을 짓고
나는 발라드풍으로 노래를 한다 커피숍 한쪽 구석에서
너무도 자주 네 꿈을 꾸었기에
그때는 밤이었지요 말라비틀어진 나무에도 연분홍 꽃이 피는 아침
집채만 한 파도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방파제
또는 열기구, 가슴속에 불을 지피던 여자를 찾아가다 추락한
어느 섬 헤엄쳐 나올 불면의 바다였지요
누군가 미소 띤 얼굴이 보내는 한 잔의 따뜻한 질책과
초승달 같은 눈빛의 차가운 격려 속에
모래밭에 집을 짓고
알 수 없는 시나 쓰던 당신처럼
지천명을 등에 업고 견디는 하루는 파도쳐 쉽게 지치고
사막을 걷다 물집에 잡힌 몸은 기댈 곳이 필요했으므로 척추를 곧추 세운 채
벽처럼 치솟는 빌딩 앞에서
열을 올리던 태양은 속까지 다 탄 숯이 되고
*시집/ 아껴 둔 잠 / 천년의시작
빈집 - 한명희
아내가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떠난 후
건너편 빌딩, 보일러실 위에 비둘기 집
암컷과 수컷이 자리바꿈한 순간
품고 있던 알을 보았다
몸 비벼 애무인 듯 격려인 듯하다가
아침 먹고 와 다시 교대를 하는지
날고 드는 날갯짓엔 얼씬얼씬
바람 같은 행복도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암컷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밤길에 치였는지 아예 가출을 해 버린 것인지
둥지를 지키는 수컷의 깃털이 꺼칠하다
발가락은 핏물 들어 붉고
그러나 우리는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이웃
뒷골목과 건너편 빌딩 사이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불면 사이에서
오늘도 수컷은 알을 품고
나는 없는 아내와 자식을 품고
# 한명희 시인은 대전 출생으로 2009년 <딩아돌하>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마이너리거>, <마른나무는 저기압에 가깝다>, <아껴 둔 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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