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제 가노니 - 허형만

마루안 2022. 4. 1. 22:34

 

 

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

 

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시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뒷굽 -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바스듬히 닳아 기울어 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