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
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시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뒷굽 -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이네요 할까 봐 더 겁났다
구두 뒷굽을 새로 갈 때마다 나는
돌고 도는 지구의 모퉁이만 밟고 살아가는 게 아닌지
순수의 영혼이 한쪽으로만 쏠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사코 한쪽으로만 바스듬히 닳아 기울어 가는
그 이유가 그지없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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