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대서 즈음 - 강시현 시집

마루안 2022. 3. 31. 19:19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시도 그렇다. 서 말 아니라 백 말이라도 읽어주는 독자가 없으면 그건 한갓 이불 속에 혼자 숨어서 하는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

 

열 권의 시집을 냈는데도 그 시인에게 아무 궁금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단 한 권의 시집에서 그 시인을 홀딱 벗겨 해부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강시현 시인이 그렇다. 시를 읽으면서 어떤 사람일지 정체성이 궁금해지는 경우다.

 

이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이다. 한 시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권은 읽은 후라고 보는데 세 번째까지 갈 것 없이 제대로 빨려들었다. 이 시인은 첫 번째 시집부터 다소 두껍다. 두 권 다 거의 100여 편의 시가 실렸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건너 뛰고 싶은 작품 하나 없이 지루하지가 않고 술술 읽힌다. 이런 시를 생활밀착형 문학이라 할까. 내가 명명한 단어지만 이 시인의 시를 읽고 나서 떠오른 생각이다.

 

강시현의 시는 묘한 끌림이 있다. 눈으로 읽는 맛도 있지만 마음으로 읽게 된다. 온전히 가슴에 담긴 시일수록 낭송하기에도 좋다. 필사하기 전에 꼭 한 번씩 낭송을 해보는데 강시현의 시는 입에 짝 달라 붙는다.

 

흔히 앵긴다고 하듯이 이 사람 시는 눈과 가슴에 앵긴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끌림이 있어야 하고 그 끌림의 종착지는 결합이다. 시인의 말이든, 첫 시든, 첫 구절부터 끌림이 있는 시집이 있는데 강시현 시집이 그렇다. 끌리는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세상 위로 떠오른 인연은 먹먹한 것이어서

두 마음은 먼 점이 되어

서로의 가슴팍을 헤집고 들어가곤 하는데,

반달처럼 휘어진 명주실이 위태위태

노을에 붉어진 그림자 둘을 이어 주고 있다

 

*시/ 방패연/ 일부

 

 

*마당에서 토막 잠을 자던 바람이 어깨를 들썩인다

이제 몸 밖도 몸 안도 조금씩 내놓아야 할 때인가

매달릴수록 떠나는 것들이 구름져 비 되어 내린다

아끼는 것들은 붙잡지 않아도 차가운 온도로 떠난다

 

*시/ 혼자 먹는 밥/ 일부

 

 

*한 생애의 품격을 정하는 것은 쓸쓸함의 강도에 있겠으나

먹고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던

장사치의 푸념이 더 미더운 시간

 

(.....)

 

최대치의 슬픔을 뽑아내는 새벽의 비린내에 목이 메고

슬픔은 조작된 이별의 장치였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세월은 눈치가 없고

시간은 쉴 틈이 없고

아무 상처도 없었던 듯

살아 본 기억도 없이 또 하루를 끌고 간다

 

*시/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일부

 

 

시집에서 대표작 중 하나로 콩국수를 꼽는다. 빼어난 작품성은 잘 모르겠고 많은 작품이 심금을 울리지만 가장 내 가슴에 와 닿는 시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면도날처럼 폐부를 스친다. 이 시인의 자화상 같은 시고 구절구절 딱 내 마음이다.

 

 

콩국수 - 강시현

 

 

일 나가는 사내에게

두툼한 가방 하나 안겨 줍니다

 

물가가 다락같이 올라도

육천 원이면 사 먹는 콩국순데

 

한밤이 이슥하도록

불린 콩을 갈아,

 

어쩌다 이런 여자를 만났나 싶기도 하고

콩국수를 먹는 내가 자랑스러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양파 풋고추를 썰어 된장 옆에 가지런히 채우고

삼단같이 오이채를 썰고

삶은 달걀도 횡단보도처럼 반쪽으로 갈라

고명으로 다른 비닐봉지에 싸 놓았습니다

 

저녁 개수대에 빈 그릇을 내놓을 때

없는 말이라도 건네 보려 생각을 하지만

걱정 없는 동화 같은 살가운 웃음만 같이 담을 요량입니다

 

아찔한 일은

묵은 옷을 모두 태운 산기슭의 여자가 간혹 잊히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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