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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나는, - 류근

어쩌다 나는, - 류근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학과지성 俗 반가사유 - 류근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날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

한줄 詩 2019.03.19

빈병 - 한명희

빈병 - 한명희 반듯한 이름표만은 자랑처럼 빛났지 사내가 긴 그림자를 끌고 매점 안을 기웃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어도 뱃속은 든든했고 날파리 들끓던 하늘은 금빛 은행잎으로 그득했었으니 사내가 거칠게 굴면 굴수록 나는 어디선가 손 싹싹 빌고 있을 그에 어미가 생각났어 탈탈 털어 먹였지 마른 젖이 나올 때까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발길질을 해대더군 거푸 두 번을 차더군 은행나무에 이슬이 맺혔지만 돌아다보지도 않았어 남루만이 형벌처럼 남았지 이처럼 내가 생각도 못한 발에 차여 공원 한쪽 차가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듯이 그는 또 어느 낯선 거리에서 속도에 차이고 바람에 휘둘리며, 낙엽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묏등 같던 그에 등이 자꾸만 생각나네 *시집, 마이너리거,..

한줄 詩 2019.03.19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

그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글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면 김서령의 글을 읽고 난 후에 딱 맞는 표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서령의 문장에 제대로 취했다. 는 김서령의 유고집이다. 내가 유독 유고집에 열광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책을 놓칠 수는 없다. 가만,,그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던가. 책을 읽기 전에는 가물가물했는데 이 책 몇 군데 구절에서 윤택수가 언급되는 걸 보고는 단박에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글이 생각났다. 그렇군. 바로 윤택수에 열광했다던 작가 김서령이었다. 나는 윤택수도 김서령도 만난 적이 없으나 글로 연결된 인연이다. 촌놈은 이런 문장에서 사르르 무너진다.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글이 왠지 슬프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몇 달 전인 2018년 1..

네줄 冊 2019.03.18

익숙한 미로 - 차주일

익숙한 미로 - 차주일 쪼그려 앉은 노인이 골목길에 엉켜 있다. 탯줄에 매달린 사람의 처음 같다. 팔로 다리를 껴안아 준 미로는 시작이거나 끝이거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살았노라 자부하던 사람이 자신을 회고하는 모습은 얼마나 복잡다난한가. 익숙한 미래를 좀체 벗어나지 못함은 다른 길들이 뒤엉켜 있다는 말. 자신을 찾아 자신을 헤맨 일생이 타인들의 노정과 판박이었으므로 자신을 회고하는 제자리를 완주라 말해도 되겠다.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타인이라 말해도 되겠다. 입구를 출구라 말해도 되겠다. *시집, 어떤 새는 모음으로만 운다, 포지션 노구 - 차주일 얼굴과 양 손바닥이 서로 묻고 있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서서 한참 동안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정표가 틈 하나 맞대어 세월을 감별하는 것처럼 ..

한줄 詩 2019.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