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병 - 한명희
반듯한 이름표만은 자랑처럼 빛났지
사내가 긴 그림자를 끌고 매점 안을 기웃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먼지를 뒤집어쓰긴 했어도 뱃속은 든든했고
날파리 들끓던 하늘은 금빛 은행잎으로 그득했었으니
사내가 거칠게 굴면 굴수록 나는
어디선가 손 싹싹 빌고 있을 그에 어미가 생각났어
탈탈 털어 먹였지 마른 젖이 나올 때까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발길질을 해대더군 거푸 두 번을 차더군
은행나무에 이슬이 맺혔지만 돌아다보지도 않았어
남루만이 형벌처럼 남았지
이처럼 내가 생각도 못한 발에 차여
공원 한쪽 차가운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듯이 그는 또
어느 낯선 거리에서
속도에 차이고
바람에 휘둘리며, 낙엽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묏등 같던 그에 등이 자꾸만 생각나네
*시집, 마이너리거, 지혜
마이너리거 읽기 - 한명희
졸고 있다 세평 남짓 흐린 형광불빛 아래서 혼자 떠들고 있는 티브이 탓이 아니다 짜장면 한 그릇에 나를 팔아넘긴 당신 탓도 아니다 오죽했으면 한방을 기대하는 당신 앞에서 저 감독은 스퀴즈번트를 시켰겠는가 쥐어짜서라도 점수를 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박빙이나 박봉이나 목줄이 타기는 마찬가지 책 볼 새 없는 당신이 코치를 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단 하루라도 눈짓 손짓을 하지 않으면 집안에 온통 에러가 발생하는 저 점수란 놈이 전광판을 바꾸고 종목을 교체한다고 부러진 배트처럼 토막 난 당신의 주가가 상승하겠는가 바닥을 기고 있는 자식 놈의 점수가 올라가겠는가 단타에 멍든 당신과 유인구에 말려든 당신, 모처럼의 기회가 작전미스로 끝나거나 맘먹고 휘두른 자식놈의 펜대가 헛손질로 끝날 때 유기견처럼 거리를 배회하거나 소주잔을 물고 있을 당신 베스트를 다했다고 베스트가 되는 것도 아니고 메이저도 정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역전에 실패한 당신이 야구장이나 객장으로 출근하다 가정으로부터 퇴출당한 얘기가 더 시적이다 잘나가는 소설 같다 그러니 신간도 주간지도 아닌 나는 그저 빗맞은 공을 기다리는 볼 보이, 헌책방 한쪽 코너에 기대 오늘도 어쩌다 굴러오는 당신과 구겨진 얼굴을 하고 헐값에 팔려올 또 다른 나를 기다리며 이렇게 졸고 있는 것이다 술 먹은 사람처럼 갈피갈피 곰팡내를 풍기면서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매(紅梅) - 권오표 (0) | 2019.03.19 |
---|---|
왼 길로 가는 까닭을 묻다 - 김종필 (0) | 2019.03.19 |
등짝이 가렵다 - 이오우 (0) | 2019.03.18 |
익숙한 미로 - 차주일 (0) | 2019.03.18 |
동백이 지고 나면 - 김태형 (0) | 2019.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