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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 박숙경

고비 - 박숙경 그나마 우기였던 짧은 여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젖은 깃털을 털며 멸종의 사선, 그 혹독을 견디는 혹부리오리떼 소금기를 머금고 일어서는 바람의 끝 말 잔등을 두드리는 유목민의 아이들, 둥지 떠날 채비를 끝낸 새끼독수리도 그 여름을 아쉬워하는 건 마찬가지 비틀거려도 기댈 곳 없는 땅 왔던 길보다 남은 얼마의 길이 고비일 게다 잘못 든 길조차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는 고비의 길 그리하여, 잘못된 길은 없는 것이다 바람과 구름의 소용돌이 둘러봐도 아무것도 없는 사위(四圍) 눈에 보이는 것만이 고비가 아니다 잡히지 않는 뼈 마디마디 속에 고비가 있고 생각의 틈새, 볼 수 없는 구멍 구멍마다 고비가 있다 심호흡을 한다 말들도 낙타도 어린 산양도 끼리끼리 모여 바람을 맞는다 어디에 서 있든 ..

한줄 詩 2019.04.01

자목련 - 서규정

자목련 - 서규정 깊은 산 속, 나무꾼의 딸과 숯장수의 아들이 물 길러 와 계곡에서 나눈 수증기 자욱한 이야기 들어나 보셨는가 사랑 그 부끄러움이 너무 커 누구 누구 위에 숨었는지, 누가 누굴 안고 돌았는지 그냥 그대로 몸이 굳어도 될 그 둘을 갈라놓은 건 땅이 쩍 갈라지는 지진이었다네 넋을 놓고 살던 처녀는 한 몸에 머리가 둘인 아이를 낳자 머리 하나가 나머지를 살리려 젖을 물지 않았다네 본능인 거지 同體大悲 가야 한다, 너를 놓으러 가지 마 가지 마 죽어서도 같이 붙어살아 꼭 그만큼의 이해와 색깔을 보듬어 안고 우리 동네 우물을 빙빙 돌듯 자목련 한 그루 뜀을 뛰며 핀다 *시집, 참 잘 익은 무릎, 신생 손님 - 서규정 키가 한 뼘도 안 되는 팬지꽃에게도 손님이 있다 먼 들녘을 훑고 오는 천혜의 햇빛..

한줄 詩 2019.04.01

풀리는, 손 - 이명우

풀리는, 손 - 이명우 중풍은 아랫도리를 신경질적으로 벗었다 웃음도 없이 입술도 없이 매일 똥을 매만졌다 온몸에 치대다가 패대기치다가 방바닥을 마구 뒹굴다가 벽에 주렁주렁 걸어놓았다 괄약근에 힘을 모아놓고 무엇을 그렇게 그리려고 하였을까? 중풍은 말문이 막히자 똥오줌으로 방바닥과 벽을 칠했다 사계절 내내 벽을 타고 피고 지고, 지고 피고, 떨어지면 붙이고 붙이다가 촉촉하게 젖은 벽지가 자박자박 방바닥에 뭉개져 내렸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마비된 수족을 돌리다가 지치면 틀어진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울대가 벽을 타고 올라가다가 벽지를 긁어내렸다 죽어가면서도 손에 똥을 쥐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손도 벽을 향하고 있었다 사 년 동안 닫혔던 방문이 열리고 친척들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와 시끌벅적하게 중풍의 몸에 매달..

한줄 詩 2019.04.01

제주 올레길 6코스

6코스는 쇠소깍에서 서귀포 도심까지 걷는 길이다. 10킬로 조금 넘는 길이로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짧은 코스다. 처음 걷는 사람도 쉽게 걸을 수 있는 평탄한 코스가 많다. 서귀포 시내길도 포함되어 있어서 꼭 그 길을 걷지 않고 해변길만 걷는다면 2시간의 올레길이라 해도 되겠다. 소쇠깍은 사진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 오래 전에 왔을 때의 원시적 풍경이 많이 변했다. 그래서 개발은 무섭다. 쇠소깍 계곡을 지나면 하효항이 나온다. 이곳은 작은 포구와 검은 모래가 깔린 해수욕장이 있다. 하효항을 지나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하다가 한동안 바다를 지척에 두고 걷는 해변길이 계속 된다. 올레길에 지칠 무렵이면 어김 없이 유채꽃이 나타나 에너지를 주입한다. 바로 앞의 섬이 섶섬이다. ..

일곱 步 2019.03.31

그해 봄, 노을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랑이여 - 황원교

그해 봄, 노을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랑이여 - 황원교 그해 삼월은 유난히 따스했다. 한 여자와 죽도록 사랑을 하여 동백꽃 같은 아이를 갖고 쥐똥나무 울타리 밑으로 봄을 속삭일 때 사랑만 있으면 배고프지 않고 사랑 때문이라면 기꺼이 죽어도 좋을 그 어리석은 희망이 무참히 낙태된 저녁, 나의 사랑은 꽃샘추위에 언 꽃처럼 떨어지고 떠나간 여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급성 폐렴과 열병에 시달리며 그렇게 봄이 가고 아침이면 베갯잇에 묻어 있는 한 움큼씩의 머리칼을 보며 의사는 항생재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끝끝내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이 증오를 낳고, 분노를 낳고, 절망을 낳고, 더 이상의 출산 능력을 상실한 폐경기 여자처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해 봄, 노을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랑이여! *시집, 빈집 지키기. 문학마..

한줄 詩 2019.03.31

제주 올레길 5코스

올레길 5코스는 남원 포구에서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약 4시간 반쯤 걸리는 비교적 짧은 길이다. 늦장 부리지 않고 꾸준하게 걸으면 4시간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걷는 여행 또한 힐링을 위한 것이다. 쉼을 위한 걷기란 너무 서둘지 않을 것과 먹는 것, 잘 것에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가다가 저물면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이날부터는 서귀포에 숙소를 잡았다. 남원 포구를 지나는데 길가에 줄줄이 오징어를 말리고 있다. 이런 풍경은 많이 봤는데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여기는 몇 년 전에 왔던 곳이라 걷다 보니 기억이 났다. 익숙함에 한참을 앉아 바다를 구경했다. 이곳은 바다에서 약 2킬로에 이르는 바위 절벽이 펼쳐지는데 엉이란 그 절벽에 생긴 그늘을 말한단다. 그러나 딱히 어떤 것이..

일곱 步 2019.03.31

제주 올레길 4코스

4코스는 표선 해수욕장에서 남원 포구까지 걷는 길이다. 예전에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걸을 때 보니 코스가 조정 되었다. 다시 걷고 싶을 정도로 좋은 코스가 사라져 아쉬웠다. 초반 해변을 걸을 때 바람이 조금 세긴 했어도 걷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4코스는 휠체어 코스도 있고 전 구간이 대부분 해변길이다. 다소 밋밋했지만 바람 타는 코스려니 하면서 걸었다. 이런 길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올레길 중에 가장 무난한 코스다. 약 6시간 소요. 지루하게 이어지는 포장 도로를 걷다가 변기 화분을 만났다.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주인의 센스가 빛난다 제주 올레길은 어느 코스든 대중교통과 연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서 해찰 부리다 코스를 다 걷지 못해도 걱정할 일이 없다. 내 경우 1~4코스를 걷는 동..

일곱 步 2019.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