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 김서령

마루안 2019. 3. 18. 22:15

 

 

 

그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글에 취한다는 말이 있다면 김서령의 글을 읽고 난 후에 딱 맞는 표현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서령의 문장에 제대로 취했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는 김서령의 유고집이다. 내가 유독 유고집에 열광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서정적인 제목을 가진 책을 놓칠 수는 없다.

가만,,그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던가. 책을 읽기 전에는 가물가물했는데 이 책 몇 군데 구절에서 윤택수가 언급되는 걸 보고는 단박에 예전에 읽었던 그녀의 글이 생각났다. 그렇군. 바로 윤택수에 열광했다던 작가 김서령이었다. 나는 윤택수도 김서령도 만난 적이 없으나 글로 연결된 인연이다.


<사래 긴 콩밭 위로 이제 막 아침볕이 쏟아질 때, 수염이 마르는 옥수수를 골라 꺾을 때, 푸른 겉치마를 벗기고 얇은 속치마를 살짝 열어젖힐 때, 속살이 여물었는지를 확인하며 실없이 설렐 때 털털하고 허우룩하게 거기 서 있던 옥수수 한 그루, 아무렇지도 않던 그가 문득 미덥고 정다워질 때,,> 촌놈은 이런 문장에서 사르르 무너진다.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글이 왠지 슬프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몇 달 전인 2018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195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북대 국문과를 나왔다. 한때 국어교사를 지내다가 신문 잡지에 글을 쓰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주옥 같은 몇 권의 책을 남겼으나 나는 아직 다 읽지를 못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여름 수박에 관한 글은 압권이다. 수박의 다섯 가지 덕을 말하는 수박에 관한 글 말미에 김서령은 이런 문장을 남긴다. <그런데 수박을 먹은 사람은 다 죽는가 보다. 김성탄도 임어당도 김현도 윤택수도 지금은 모조리 여기서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 또한 수박을 엄청나게 먹었댔으니 불원간 그들이 간 곳으로 가게 될 게 뻔하다>.

호박꽃이 피면 여름이 온다. 그녀는 이 문장에서 호박으로 만든 각종 반찬을 아주 군침 돌게 서술한다. 엄마와 호박과 밤(栗>과 고등어와 그녀의 탯자리인 안동의 사투리까지 잘 버무려서 환상적인 문장을 완성한다. 삶을 향한 긍정적인 시선이 눈부시다.

<철마다 맛있는 채소를 길러내는 땅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황홀하다. 어쩌면 이승에 생명을 얻어 사는 보람은 그걸로 충분한 건지도 모른다. 그 외의 것은 모조리 덤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옷을 지어 입는 것도,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주앉은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도, 운 좋게도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만드는 것도, 그 아이가 내게 방긋 웃는 것도 땅에 발을 디디는 기쁨 이후에 감각하는 덤에 속한다. 누구의 삶이든 이 덤이 더 크니 생명을 얻어 지상에 둥지를 튼다는 것은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그러나 우린 우리 덤에 취해 정작 본질을 잊고 산다. 심각한 어리석음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이 책은 각종 음식과 연결된 인생 이야기도 맛깔스럽지만 순 식물성 무공해 문장으로 가득하다. 음식에 대한 향수 때문에 단번에 읽히는 글이지만 조금씩 아껴 가면서 읽어야 안구 정화가 제대로 된다. 늦기 전에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