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멍 - 부정일 시집

마루안 2022. 5. 29. 19:19

 

 

 

천성이란게 있다.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그런 걸 떠나서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절반씩 들어 있다고 본다. 단 얼마나 선이 악을 누르고 표출되는 정도가 선함의 실천이지 않을까.

 

곧 악을 누르는 힘이 좀더 세게 태어난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만약 악한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가 개과천선을 했다면 바로 누르는 힘의 강도가 악에서 선으로 바뀐 것이다.

 

내 몸 속에도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다. 웬만하면 욕심 부리지 말고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굳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지가 않다.

 

무명 시인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내 천성이다. 인생이 편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지만 여태껏 단단한 긴 줄보다 허름한 짧은 줄을 택했다.

 

지금도 금메달보다 은메달이, 동메달보다 4등에게 마음이 더 간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바 만날 시집은 결국 눈에 띄게 마련인가 보다였다. 시집 자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

혹 인연이 있어 누군가의 손에 들게 된다면

누군가의 해우소쯤에서라도 잠시 눈이 가는 정도이면

하는 바람이다

 

 

인연이 어디 사람에게만 있을까. 아마도 10년 전쯤 이런 시집을 만났다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을 시집이다.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무채색 시에 흠뻑 취했다.

 

부정일 시인은 1954년 제주에서 나서 지금도 제주에 살고 있다. 곧 칠순을 앞둔 시인에게 모든 사물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착하게 살다 늙은 시인의 눈은 이렇게 아름답다. 처음 멍이란 제목에서 피부에 생긴 멍을 떠올렸다. 제주라는 섬에서 살며 가슴에 든 멍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을 읽고 제목을 이해했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 늙어갈 때쯤이면

오라는 곳은 줄고

갈 곳 또한 망설여져

어쩌다 보면 집에 머무는 날 많아

볕 좋은 마당 한편에 앉아

멍하니 먼 산이나 보고 있는

뒷방 늙은이 같은 자신을 볼 때가 있다

아니라고 부정할수록 더 초라해질 것만 같아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멍을 쓰게 됐음을 밝힌다

 

 

시집에는 나이 먹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시가 많다. 나이는 가만히 있어도 먹는다. 그러나 연륜은 거저 쌓이는 것이 아니다. 부정일 시인은 2014년 예순의 나이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다.

 

이 시집을 읽고 나면 비록 멍을 때릴지라도 그냥 살지 말 것을 일깨우게 한다. 담백한 듯하면서도 읽고 나면 싸한 느낌이 가슴 가득 채워지는 시다. 숨어 있는 들꽃 같은 착한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