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마루안 2022. 6. 1. 22:17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깎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겨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던져진 이유 - 최규환

 

 

일을 마치면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마음만으론 수천 갈래의 바다를 헤집고 나왔다가
비곡(悲谷)을 떠도는 것인데

반듯한 건물을 끼고 돌아설 때
다른 세상을 꿈꾸는 허망에 빠져버립니다

최소한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저녁에는 없고

도시의 윤곽과 그림자가 섞인 밤이 되면
골목에 들어 마음의 진저리를 들춰내고 맙니다

견디는 일이 다반사임에도
있는 힘 다해 흔들리는 이파리의 저녁을 보면
스스로에게 허물을 넘겨주는 어이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늘만 살고 싶다가도
세상에 던져진 뜻을 어쩔 수 없어

참나무 벤치에 앉아
참나무가 견뎌내는 제 몫의 뜨거움에
내 몸도 덩달아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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