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깎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겨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던져진 이유 - 최규환
일을 마치면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마음만으론 수천 갈래의 바다를 헤집고 나왔다가
비곡(悲谷)을 떠도는 것인데
반듯한 건물을 끼고 돌아설 때
다른 세상을 꿈꾸는 허망에 빠져버립니다
최소한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저녁에는 없고
도시의 윤곽과 그림자가 섞인 밤이 되면
골목에 들어 마음의 진저리를 들춰내고 맙니다
견디는 일이 다반사임에도
있는 힘 다해 흔들리는 이파리의 저녁을 보면
스스로에게 허물을 넘겨주는 어이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늘만 살고 싶다가도
세상에 던져진 뜻을 어쩔 수 없어
참나무 벤치에 앉아
참나무가 견뎌내는 제 몫의 뜨거움에
내 몸도 덩달아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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