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의 변명 - 우혁
조금 덥다 싶은 날이면
허투루 흩어놓은 듯한 철자들을
찾아보아요
성급할 것도 없는
오후, 오전부터 쌓인 별은
자신의 퇴적층에서 당신의 눈을
화석처럼 발견하곤 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라던 닦으라고 애원하던
오래된 노랫말은
'무엇인가 꽉 찬' 지면 위에
라벨처럼 붙어 있어요
그러다 당신은 무심결에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몸 바뀐 그림자
난 사랑을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
없음에 대한 기록들
있어 본 적이 없는 운명들을
종종 잘못된 발음으로
발화해요
괜찮아요
오자를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있어달라는 애원이었죠
이럴 때 흘리는 눈물은
제법 알 굵은 호박색이랍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바람 - 우혁
-몸 밖의 모든 것은 푸르다
돌아올 때는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네
눈물은 삼킬 때만 의미 있지
흐르는 것들은
이제 다른 이름으로 멀어지거든
바람이라고 쉽게 말할까
세상의 끝에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닌
몸을 밀어내는 것
다른 누군가를 끌어안고
흩어지는 것
흐른 눈물이 떨어질 틈도 없이
말라붙은
윤곽을 따라
흔적 밖으로 자리를 만들지
태어나서 오직
바람만 말할 수 있다는
아이
흔들리며 자라네
# 우혁 시인은 1970년 서울 출생으로 한국외대 인도어과를 졸업했다. 2002년 <미네르바>로 등단했다. <오늘은 밤이 온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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