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조난신호 - 전대호

마루안 2022. 5. 29. 19:26

 

 

조난신호 - 전대호

 

 

말 없는 바닥아,

목숨 붙은 이래 줄곧

허공에 매달려 있었기에

우리 서로 닿은 적 없구나.

필시 귀도 없을 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구나.

 

암벽에 달라붙은 그가 문득 이동을 멈추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시작했을 때,

홀드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쥐며

자유로운 팔로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무릇 목숨 붙은 놈이 보내는 신호는 다 조난신호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곧 간다고, 철퍼덕 들이닥쳐

속을 다 쏟아놓겠다고,

바닥에게 기별하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뭐 대수로울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말 없는 바닥을 향한 조난신호였으므로.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닻과 연 - 전대호

 

 

내가 내린 닻

바닥에 닿지 않았지.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음을,

어쩌면 아예 바닥이 없음을

알 만큼 아니까.

 

그래도 물속을 쟁기질하며

제법 구실을 하네.

닻으로 이어진 밧줄 팽팽해질 때면,

자못 든든해지는 것이

실없이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나의 닻,

걷잡을 수 없는 표류의 동반자여,

걷잡는 시늉을 확실히 해주게.

나의 마구잡이 운동을

불굴의 저항으로 채색해주게.

 

깊이 잠들어 중력을 잊는 밤이면,

나를 둘러싼 별들 어지럽게 흐르고,

밧줄은 실로 변신하네.

나의 닻은 나의 연.

 

내가 내린 양 갈래 닻은

내가 띄운 행글라이더 연.

어쩌면 나는

닻이 띄운 연,

연이 내린 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