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극장 - 이현승
마음이 하는 짓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였지만
또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였으므로
어쩐지 위대함으로 압도하는 당신 앞에서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될까.
마음은, 왜 그러는가
꼭대기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응시하면서
그런다고 더 빨리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더 힘껏 더 자주 호출 버튼을 누르고
멀리 보면 모두들 제각기 갈 길을 갈 뿐인데
누군가가 자꾸 내 인생으로 끼어든다고 생각하며
어쩌다 내가 가서 한잔하면 그 술집에 손님이 붐빈다거나
심지어는 내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는 내가 안 봐야 이긴다거나
변덕이죽 끓듯 한 이 마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없는가.
마음은 유령거미처럼
종종 여기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가 없는 사람 취급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침에 잠 안 깬 눈으로 멍하니 어딜 보다가 발견한 거미처럼
정작 여기 나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밖에 없다는 것이야말로 유령이 아닐까.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다정다감 - 이현승
조현병이나 류머티즘처럼
일생을 두고 앓는 병에 대해 생각한다.
처음엔 살이 터질 듯 조이는 구속복 같다가
마침내 제 살갗처럼 익숙해진 병.
일생 병과 함께 사는 삶이라면
한 절반은 아프고 절반은 또 견딜 만한 생일 텐데
아플 때는 잠 속에서도 아프고 꿈속에서도 아파서
어젯밤 꿈에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는 사람처럼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 거냐고 따져 묻고 싶지만
아픔의 한가운데는 까무룩,
태풍의 눈처럼 섬뜩한 고요가 있다.
풍경소리가 빠져죽은 연못의 적요.
금방 숨비소리처럼 다시 헐떡임이 떠오를 것만 같다.
내내 아프다가 이따금 통증을 잊는 삶은
견딜 만하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아픈 삶일 텐데
아픔을 잠시 잊은,
언제고 불쑥 찾아올 아픔을 기다리는
나는 이따금 시가 이런 통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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