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마루안 2022. 5. 29. 19:37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계산이 묻어 나온다
반갑기보다 저의가 묻어 나온다
내심 잘도 잊지 않았구나 싶은데
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
때론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더구나

네가 아직 죽지도 않았더구나
궁금하기도 해서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
넌 먼 강산과 오늘 날씨를 말하더구나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을 끌어들이더구나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더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
쓸개 빠진 덕담과 공허한 잡담
부탁 아니면 둘도 없는 네 외로움
전화를 기다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더구나
네가 아직도 글을 쓰더구나
나는 내가 쓴 글에 관심 없는데
넌 먼 평판과 오늘 인심을 말하더구나
나의 벌거숭이 문장을 말하더구나
아직도 여전하구먼 하더구나
술에 취해 전화하던 날들이 지나갔다
돈 빌릴 데가 있던 날들이 지나갔다
심심한데 만나서 담배나 한 대 피자는 날들이 가 버렸다
파도의 높이를 향해 떠나자던 날들 역시 감감해졌구나
그럼에도 혹시 돈 가진 거 없냐고 묻더구나
인간에게 향기가 있었던가
나만의 향기
너에의 향기
만물에 다가가는 향기
보고픈 향기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설렘이 없다
나의 냉대가 있다


*시집/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달아실

 

 

 

 

 

돈 - 박용하

 

 

나는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는 나이가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이익 없이는 아무도 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부모형제도 계산 따라 움직이고
마누라도 친구도 계산 따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게 싫었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고

너 없이는 하루가 움직이지 않았고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 박용하 시인은 1963년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강원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바다로 가는 서른세 번째 길>, <영혼의 북쪽>, <見者견자>, <한 남자>, <26세를 위한 여섯 개의 묵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