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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인연 - 박미경

불안한 인연 - 박미경 엄마다 나만 보면 웃는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고 슬프기 그지없는 나의 엄마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던 여인 몇, 엄마였다 슬픈 엄마는 부지런한 남편을 만나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생은 너무나 짧았다 떠난 뒤 일 년도 채 안 돼 거처가 있던 여인 작정하고 덤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안방에 누웠다 모든 잠든 밤, 집은 나 대신 울적해졌다 밥그릇 씻는 소리 요란해지자 아버지는 붙잡기 위한 술책으로 위채 기둥을 뽑아 주었다 아주 잠깐 웃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헛마음만 열어놓았다 닫았다 했다 그 후 뿌리째 뽑혀 나간 여러 개의 기둥에는 무수한 오해들이 달려 나왔다 뭔 일 없는 것처럼 뭔 일은 늘 벌어져 있었다 와중에 오래 머물다 떠난 이 있었다 땡볕 아래에서 캄캄한 긴 ..

한줄 詩 2020.06.21

여덟 개의 슬픈 이야기

1, 비밀번호 한동안 헤어진 사람의 전화 번호를 잊지 않았다. 이유는 그 번호로 조합해 만든 비밀번호 때문이다. 가끔 생각한다. 아니 비밀번호를 넣을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을까. 어느 쪽이었든 내가 먼저 붙잡았어야 했다. 2, 망나니를 위한 변명 얼마전에 뉴스에 팔순 어머니를 응급실에 버린 오십대 아들의 기사가 나왔다. 요양원에 있던 모친이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이켜 응급실에 실려왔고 응급 조치를 한 의사는 위기를 넘겼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다. 어머니와 의사에게 폭언을 퍼붓는 이런 아들을 패륜아라고 부른다. 댓글 대부분이 아들에 대한 비판이다. 20년 후 너도 니 자식한테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 등 악필이다. 그중 하나의 댓글이 눈에 띈다. 아들에게도 말 못할 사연이 있을..

열줄 哀 2020.06.21

증언 혐오 - 조정환

이 책은 자매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과 같이 읽었다. 쌍둥이 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저자 조정환 선생은 많은 책을 썼지만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나도 외에는 이 양반 책을 읽은 것이 처음이다. 이 책을 읽고 안도감과 함께 다소의 혼란이 왔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호기심이 꼬리를 문다. 없는 시간 쪼개 다른 책도 읽었다. 윤지오가 쓴 , 서민 교수의 , 한학수 피디의 까지,, 투수가 던진 공 하나에도 한쪽은 분명 스트라이크라 하고 상대팀은 볼이라 여긴다. 하물며 장자연 사건은 오죽할까. 서 있는 곳과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진실과 거짓이 구분되고 있다. 장자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분명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한 죽음이다. 이 죽음 뒤에 무엇이 감춰져 있을까. 조정환 선생은 이 책을 통해..

네줄 冊 2020.06.21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 조항록 미끄러질까 걷다가, 한 번쯤 나를 잊었더라면 사물들이 형상의 고통을 잊고 쓰임새만 남기듯 한 시절 그윽하게 나를 불태우기만 했더라면 망설일 것이 뭐라고 서성거릴 것이, 두리번거릴 것이 허정거리는 밤거리가 뭐라고 하얀 뼛가루처럼 순결했던 나의 무지(無知) 그걸 알아, 두 눈 질끈 감았더라면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옛 노래 - 조항록 진작 잊은 줄 알았는데 입에서 맴도는 멜로디 내가 그 노래를 처음 들은 게 언제였더라? 열아홉 살의 지하 음악다방에서는 바깥의 햇살을 몰랐지 한순간 세상에 꽃들이 만발할 줄이야 사뿐히 한참 낙엽이 쌓여 세상의 길들을 쓸쓸히 용서할 줄이야 네가 떠나고 벌써 여러 번의 계절이 이승의 굳은살을 도려냈는데 나는 그 노래를 잊지 못했던 것..

한줄 詩 2020.06.19

하루의 감정 - 김정수

하루의 감정 - 김정수 한결같이 당신은, 아침 6시 30분에 출근한다 베란다의 아침은 뜨겁거나 푸르거나 지나치게 높아 눈 익은 풍경은 살, 풍경의 잔영 눈에서 서걱거리는 뒷모습이 빠르게 반짝거리면 남은 슬픔 선뜻, 서툴고 말없이 아침을 식별한 손과 손의 간격, 그 간극은 사과만큼 벌어지고 포장지를 벗겨 씻지 않고 먹는 아사삭, 밖에 나가도 안을 걱정하는 당신은 나무의 전생을 닮았다 길가 대신 물가에 서있던 비릿한 미루나무 물고기가 거꾸로 처박혀 파닥거리는 듯한 등의 지느러미쯤 앉아 있던 새 떼가 일제히 비늘을 털면 물 머금은 구름이 빠끔거리고 낚시라는 소일거리는 소류지에서 영혼을 말리는 일 봄을 꿰어 한가한 겨울을 낚는 저녁 6시 30분, 당신을 기다리던 불안은 은밀히 먼 곳을 응시하고 어둠은 노을과 노..

한줄 詩 2020.06.18

신용불량자 - 백성민

신용불량자 - 백성민 사거리에 우두커니 선다. 길마다 햇살 빛나고 손잡은 웃음들이 거리에 넘쳐난다. 어쩌다 그대와 나 숨겨진 이름 하나 가슴에 품었는가? 세상 누군들 눈부심 모를까만 막달바람은 어느 봄을 마중할지 투덕투덕 어두운 골목길 발걸음 뒤로 깨금발 소주병이 뒤를 따른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다시 올 그날 - 백성민 늦은 잠에서 깨어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울 앞에 앉는다. 푸른곰팡이가 세월을 갈아먹었을까? 귀퉁이마다 흰 반점들이 수은처럼 번져간다. 시간의 쉼표마다 탄식은 빠른 물살로 흘러간다. 어디쯤이었을까? 투명했던 시간들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들 처진 어깨와 늘어진 살갗들이 몸부림을 친다. 길을 나서야겠다, 오래된 햇살이라도 반겨 맞으려면 *..

한줄 詩 2020.06.18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알약들의 왈츠 - 이소연 복용지침서를 무시한다는 건 살고 싶다는 걸까 죽고 싶다는 걸까 약을 먹이려고 하면 우는 아이 앞에는 여섯 시간마다 사막이 펼쳐진다 소분된 알약은 하루치의 발자국 같아서 사라지길 좋아하고 글씨들은 자리를 바꾸다 실수를 저지른다 수지 아니면 지수가 새처럼 무관한 봄볕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왈츠를 가르친다 사람들은 내 위로 잠이 쏟아졌다고 한다 분명, 춤을 따라 췄는데 왈츠, 이게 혹시 잘못 지은 약이라면 아이가 뒤바뀌듯 남의 약을 집어온 거라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까 봐 나는 자꾸 약을 아낀다 먹지 못한 약이 남아 있어도 나는 호전되고 증상이 다른 사람이 내 약을 대신 먹고 죽는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약사를 사랑하던 사람이 해준 이야기 요즘 약사들은 처방전 없이는 약을 짓지 ..

한줄 詩 2020.06.17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 우남정 시집

낯선 시집을 만나면 책 날개에 적힌 약력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이 시집이 그랬다. 긴 제목을 달고 나온 첫 시집이다. 두어 편 읽으면서 이 사람 적어도 오십은 넘었겠구나 했다. 중간쯤 읽다 예순 살은 넘어야 보이는 시라고 여겼다. 맞다. 우남정 시인은 환갑이 넘은 여성 시인이다. 시인 약력에서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지 모르나 그것 또한 독자와 공감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 정보다. 시인의 본명은 우옥자, 이 시집을 내기 전 본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고 시집을 내기도 했다. 숨어 있는 시인에게 관심이 많은 탓에 뜻밖에 걸려 든 좋은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그냥 읽고 마는 시인이 아님을 직감하고 정보를 추가했다. 이 시집을 유심히 읽은 것도 시인의 본명에 유난히 정이 가고 시집 또한 공감 가는..

네줄 冊 2020.06.16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너는 동사서독에서 복사꽃을 보았다 하고 나는 그곳에서 푸른 바다를 보았다 했네 바다는 떠돌이를 부르는 주문처럼 보이지 않는 섬을 옮기면서 이동하고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랑은 영원할까 우리의 희망도 동사서독 필름처럼 다시 재생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억은 모두 다르고 모래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기억은 남은 인생을 어디에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천상의 복숭아를 훔치는 동자처럼 기억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기억 또한 나를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랐네 나는 동사서독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너는 복사꽃 향기에 매혹당한 이십대를 보냈다 했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이 서로 합치하는 순간은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도 아닐 것이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

한줄 詩 2020.06.16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아득한 내일에게 - 김사이 아기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된 마을 도시 뒷골목에서 싸게 일하는 앳된 이주민 여자들 깡촌에도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국내 여자를 사랑하지 못해 반백이 된 동창은 갓 스무살 필리핀 처녀를 사랑했단다 아이를 가졌다고 나를 곁눈질하는 엄마가 사람만 좋으면 되지 않겄나며 중얼거린다 맞아요, 사람만 좋으면 되는데 사람이 사람이고 또 사람이 사람이라고 논밭을 팔고 몸을 팔고 절망을 팔아서 아이가 파랑새를 찾으러 떠날 수 있다면 노동이 죽은 땅에도 다시 씨앗을 심을 수 있다면 다민족 아이들이 다국적으로 고르게 자라날 텐데 인간의 피는 색이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어나면서 돌고 돌아 서로의 고통 속으로 스며들어 빚어낸 오색 빛깔 다채롭고 찬란한 색들로 채워진 선물 같은 세상 오리라는 상상 너..

한줄 詩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