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 정진혁 시집

마루안 2020. 6. 28. 19:12

 

 

 

예전에 어느 지면에선가 시인들이 추천하는 시집 목록을 보고 꼼꼼히 기록했다가 하나 하나 찾아 읽었던 적이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 본다지만 그 고상한 시집들은 대부분 나와 무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나의 시 읽기가 완전 하수임을 증명한 셈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나 다들 졸립다는 지루한 예술 영화는 진지하게 잘 보면서 왜 그런 고급(?) 시집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걸까. 새로 생긴 애인에게 자랑할 일도 없는데 내용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들은 많이 배우고 성공한 사람들이라 내가 쳐다보지 못할 위치에 있는데 그들이 읽은 책은 별로 공감이 없다. 이후 나는 남들이 추천하는 책을 믿지 않는다. 나만의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읽는다.

요즘 몇 권의 좋은 시집을 만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이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이다. 쉬운 어휘로 독자를 끌어 들이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많이 알려진 시인도 아니고 작품 발표가 활발한 것도 아니어서 이 책이 세 번째 시집이다.

내가 아는 시인의 정보도 사범대를 졸업하고 교직 생활을 했다는 정도다. 시단에 얼굴을 자주 내밀고 교류하는 성격도 아닌 모양이다. 조용히 선생질 본분 속에서 가슴에 쌓인 시심을 차곡차곡 펼치며 자신의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시집엔 분홍색이 자주 나온다. 청량감과 우울함이 겹치는 파란색 표지를 두른 시집 속에서 분홍색이 묻어난다. 분홍색으로 물든 그의 시를 읽으니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는 분홍색을 도화색이라고 불렀다.

장에 갈 때면 도화색 저고리를 입었고 겨울이면 누이가 뜬 도화색 목도리를 둘렀다. 장독대 주변에서 딱 이맘때쯤 피기 시작한 봉숭아도 분홍색이었다. 그래서 비 그친 여름날 가끔 뱀이 나와 장독대 주변을 배회했던 것일까.

어머니를 꼭 닮은 누이가 봉숭아 물을 들인 손톱도 주홍색이었다. 쏟아지는 시집 속에서 이렇게 좋은 시집을 발견한 내 눈썰미가 대견하다. 오랜 기간 시를 읽으면서 숨어 있는 시를 발견하는 눈도 많이 늘었다.

눈물이 비칠 것 같은 우울 속의 투명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그리운 것들은 늘 멀리 있다지만 너도바람꽃같은 시집 속의 문장은 <시인이 어딘가에 비스듬히 꽂아 두고 온 것들이다>.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이라 했다. 분홍색 셔츠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