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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옹호하라 - 류은숙

이라는 책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먹방을 즐겨 보는 사람은 이 책이 맛집 순례기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인권운동가 류은숙이 자기 사무실 공부방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다. 격식을 갖춘 인터뷰가 아닌 술과 밥을 놓고 나눈 터라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요즘 정의연 윤미향 씨 논란을 보듯이 활동가들은 자기 신념이 없으면 지속하기가 힘들다. 윤미향 씨 30년 동안의 활동을 언론은 한순간에 파렴치범으로 만들어 매도를 한다. 그 운동을 폄훼하며 한쪽은 이용당했다 한탄한다. 가만히 뒀으면 잊혀졌을 무명 배우를 주연으로 발탁해 이름 알려줬더니 그동안 서운했던 것 차곡차곡 쌓아뒀다 자신을 이용했다며 감독을 매도하는 거나 진배 없다. 부부나 친구 사이에도 의견 충돌할 때마다 쌓인 미움 꼽자면 한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활..

네줄 冊 2020.06.12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가장 가까운 전생이 왜 이리 먼가 바람이 슬어놓고 간 햇살 뒹구는 씨앗 한 줌 삼키고 바깥마루에 누워 나무 한 그루 낳았다 나무는 쿨럭이며 엄동설한 뒤 찾아온 봄을 끌어안더니 여름 꽃을 좋아하는 여자와 입을 맞추었다 저녁 바람에 뿔질하던 나무는 어둠이 오길 기다려 목을 풀고 별 나비 불러모아 화음을 연습했다 당신은 어디만큼 왔을까 까치발로 선 나무는 자꾸만 화장실에 먼저 가고 싶고 가사는 하나도 외워지지 않았다 망가진 자전거 끌고 돌아오는 옛집 여름 나무 아래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은빛 목화 세레나데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별다방 미쓰리 - 조현정 ​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 좁은 계단을 오르면 흘러간 드라마처럼 껌을 짝짝 씹으며 까만 속눈썹 울려붙이는 그녀가 있지 커다란..

한줄 詩 2020.06.12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이 길로 고래가 지나갔다 안쪽으로 휜 가로수들 곧장 걸으면 다다른다고 했다 담장에 그려진 벽화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입 모양에도 솔깃하여 어느 문설주에 걸린 풍경 부르는 소리에도 혹하여 가다 보면 아까 들어선 길목 봄꽃 피었던 화단에 국화가 담겨 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는지 모른다 담장을 돌아서면 커피 향 그윽한 카페가 수줍은 듯 앉아 있다 고래가 묵어 간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천의 사계가 한꺼번에 흐르고 있거나 달이 묻혀 있을 것이다 이 길을 찾아 나서려면 알고 있는 길을 모두 버려야 한다 도착은 결코 돌아서지 못하는 중독 수없이 가 본 적 있어도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불치 섬이나 국경이나 수목 한계선을 넘어선 철새들이 다시 수목 한계선을 향해 날아야 하듯 너에..

한줄 詩 2020.06.11

예술인 복지에서 삶의 향유로 - 이범헌

난데 없는 코로나 사태로 일상이 완전히 바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 자체를 꺼리다 보니 극장 나들이는 물론 미술관 안 간 지가 5개월쯤 되었다. 평소 여러 분야에 호기심이 많은 터라 유난히 활동량이 많은 편이다. 그 일상을 갑자기 멈추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견디면 곧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했으나 속절 없이 길어지고 있다. 국제선 비행기가 멈춰버린 일상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설사 코로나가 종식 된다 해도 당분간 일상이 예전처럼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영영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고 돌아가더라도 이 전염병을 계기로 사회 많은 부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일상이 변하면 문화도 변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

네줄 冊 2020.06.10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토굴 뜨락의 욱 자란 철쭉나무 우듬지를 자른다 꽃이 화려 찬란하다는 오만처럼 우주를 온통 제 꽃만으로 장식하겠다는 탐욕처럼 헌걸찬 그들의 세력지, 무엄한 그들 군락 속에 토굴 주인의 번뇌 너울처럼 자생한 찔레나무와 산딸기와 쇠무릎과 모시풀과 팽나무와 억새풀 띠풀의 줄기들, 초여름 들어 미친 듯이 들솟는 죽순도 자른다 올곧음과 실바람 한 줄기에도 소곤거리는 푸른 물 뚝뚝 듣는 중얼거림과 낄낄거림과 창문에 비치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를 즐기려고 장려한 솜대나무가 토굴 주인을 압박하는 괴물이 되어 있다 서재의 방바닥과 바람벽 사이에서 죽순 하나가 식인종의 창처럼 들솟은 적이 있었다 덧거친 겁박 속에서 토굴 주인이 살아가는 것은 싸움이다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한줄 詩 2020.06.10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숨을 헐떡이며 야트막한 언덕에 닿았다 붉은 사막 가운데 거짓말처럼 바위산이 우뚝 서있고 뒤편엔 소금호수가 눈처럼 빛났다 뜻밖이었다 모래언덕 정상에는 더벅머리에 수염 덥수룩한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동그란 얼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가지 말라 애원이다 뭉그러진 얼굴이 안타까워 마른 가지를 꺾어 눈과 눈썹을 만들고 오뚝한 콧날과 입술도 그렸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듬직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거친 머릿결 쓸어주며 외롭더라도 잘 지내라며 토닥토닥하고 돌아서는데 오 이런, 낯이 익다 초면이 아니다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춘몽(春夢) - 김인자 신기루 격렬 뒤 적막 이 세상에만 있는 계절 산을 넘고 둑을 범람해..

한줄 詩 2020.06.09

흑백 추억 - 최서림

흑백 추억 - 최서림 낡은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첫사랑 사진 한 장, 빛바랜 편지지에 싸여 있다. 마른 장미 바스락거리는 향기가 난다. 이사 다닐 때마다 몰래 숨어 내 방에서 사십여 년을 동거해왔구나! 꿈속에서처럼 조금도 늙지 않았으나 마른 장미같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세상 안으로 꺼내면 금방 바스러질 것 같아 낡은 편지지에다 곱게 다시 싸서 내 몸 가장 깊은 곳에다 숨겨주었다. *시집, 사람의 향기, 시와에세이 감꽃처럼 - 최서림 무심코들 밟고 지나가는 감꽃을 보면 감꽃 같은 엄마가 아슴아슴 떠오른다. 박수근의 아낙네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살다 간 엄마 생각에 내 생(生)이 젖어온다. 해는 길고 시락죽도 떨어진 날, 감꽃을 주어주던 애잔한 얼굴로 막내를 잊지 못해 꿈으로 찾아온다. 아기 배꼽보다 작..

한줄 詩 2020.06.09

산색 - 손택수

산색 - 손택수 산등성이의 신록이 등성이 너머로 번진다 산빛이 산을 벗어나서 공제선 너머 무한으로 산을 넘치게 하는 것 같다 번지는 산빛으로 하여 산이 흔들흔들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저 색을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능선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색, 있는데 틀림없이 없는 저 빛깔, 툇마루 끝에 나앉아 해종일 앞산을 보고 있던 노인의 말년이 마냥 적적기만 한 것은 아니었겠다 가만히 앉은 채로 저를 넘어가는 넘어가는 산빛 떠나온 들판을 쓰다듬으며 쓰다듬으며 온다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응달 - 손택수 그늘이 만든 위성, 스란치마 스적이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안에서 감꽃 목걸이를 한 계집아이, 우물을 울림통으로 지하 깊숙이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실로폰 소리를 내는 물방울이 뚝뚝 수면을 두드리고 ..

한줄 詩 2020.06.09

사이도 좋게 딱 - 황형철 시집

무작위로 꽂혀 있는 시집 코너에서 어떤 선을 긋고 나서 그 안에서 시집을 선택한다면 몇 권이나 고를 수 있을까. 나름 열심히 시를 읽으려고 하지만 열 권 중에 한 권 눈에 들어오면 대단한 행운이다. 시인의 유명세나 미디어 언급 빈도와는 별개다.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보통 스무 권 중에서 한 권 정도의 확률이다. 시집을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내 마음에 들어오는 시로 한정한다. 가능한 이 땅의 모든 시집을 읽고 싶으나 아량을 베풀 시간이 없다. 읽을 것은 많고 시간은 없고, 활자를 받아들이는 내 눈은 점점 늙어간다. 이럴 때마다 싱싱했을 때 더 많은 책 읽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리 싸돌아 댕기면서 게으름을 피웠나 몰라. 내겐 먹는 것이 남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남는 것이다. 이 시집을 발..

네줄 冊 2020.06.08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다섯 그루 - 황형철 염치쯤이야 모른 척하고 꼭 좀 탐이 나는 게 있어 가만 앉아서도 상춘할 수..

한줄 詩 2020.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