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홀연, 선잠 - 김정수 시집

마루안 2020. 6. 29. 22:02

 

 

 

시집 나오기를 기다렸던 시인이다. 기다리면서 대충 예상은 했다. 천년의시작에서 조만간 시집이 나오지 않을까 했다. 문학 전문 메이저 출판사를 빼면 천년의시작이 가장 활발하게 시집을 내고 있는 출판사다.

한번 눈도장을 찍은 시인이 시집을 내면 검증 절차 없이 선택을 한다. 이 시집이 그랬다. 기대를 비껴가지 않고 모든 시편이 절절하게 가슴에 스며든다. 반복해서 읽고 싶은 시가 많은 시집은 한동안 가방 속에서 출퇴근을 함께 한다.

시집 하나 고르는데 뭐 검증까지야 할지 모르나 나름 검증을 까다롭게 한다. 많은 시보다 좋은 시를 읽고 싶은 사람의 시간 절약 방법이다. 목차에서 눈에 들어오는 시 몇 편 읽고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 보는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약력이 너무 부실해도 선택에서 제외 한다. 시인은 오직 작품으로 평가 받으면 된다? 좋은 대학, 명망 있는 상 받은 것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시인이 걸어온 길을 대충 가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기초 정보조차 없이 시인을 아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비평가 만큼은 아니겠지만 시를 많이 읽다보니 습관이 생겼다. 읽어야 할 시와 그냥 건너 뛰는 시를 구분하는 것이다.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구분이 아니다. 가슴에 들어오는 시와 들지 않고 주변에서 겉도는 시의 구분이다.

시집은 넘쳐나는데 들어오는 시보다 겉도는 시가 많다. 독자는 싫은 사람과도 웃으면서 악수를 해야 하는 정치인과 다르다. '마음에 들어오는 시를 읽을래요.' 시만 읽을래요가 아닌 시를 읽을래요다. 언젠가 눈길이 갈지 모르기에 그 정도의 여지는 둔다.

<홀연, 선잠>이라는 제목도 마음에 든다. 다소 불교적이면서 우화적인 제목이다. 이전의 시집에서 이미 느꼈지만 시인의 詩的 배경은 기름진 사막이다. 매마른 푸석함에서 배어나오는 촉촉한 시심, 그는 사막의 모래 속에서 푸른 빛의 시를 발견한다.

그 기름진 사막에서 건진 푸른 시를 몇 편 골라보면 <꽃의 절벽>, <신발>, <물의 서쪽>, <장마 이후>, <킁킁거리는 지상> 등이다. 내 삶이 늘 위태위태하고 휘청거렸기 때문일까.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절창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등단 30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낸다. 결국 10년 만에 한 권씩 낸 셈이다. 그럼 됐다>. 성미 급한 독자라도 이런 진국이 담긴 시집이라면 10년쯤은 기다릴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