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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아빠가 됐다 - 조기현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 또는 핏줄이 땡긴다, 등 가족이라는 끈을 강조하는 문구를 인용한다. 맞다. 어릴 때 헤어진 부모나 형제를 성인이 되어 못 알아보는 것은 연속극에서나 보는 일이고 대부분 닮은 꼴을 떠나 저절로 핏줄이 땡겨서 알아 본다. 둘 다 아기 때 헤어졌다면 혹 모를까 곧 데리러 오겠다며 떠난 오빠를 훗날 여동생이 못 알아 보는 연속극 설정은 유치하다. 그런 것을 울궈먹는 작가의 상상력도 대단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났어도 몇 마디 나눠보면 금방 핏줄임을 알 수 있는 끌림은 인간의 유전자다. 그런 가족이 때론 짐이 되거나 혹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낳아 준 것밖에 없는 아버지를 병간호하는 한 청년의 이야기다. 넋두리가 아닌 가족이라는 끈을 끊지 못해 병든 아버지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의 생생..

네줄 冊 2020.08.07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잊거나 잊히거나 - 이정훈 코요테 한마리 독약 먹고 죽은 쥐를 삼켰죠 숨 끊어지기 전에 도끼로 꼬리를 내려치세요 뼈와 살이 잘리는 것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더 견디기 힘든 건 무엇입니까? 제게도 꼬리의 흔적이 있어요 피거품이 입을 막아 한마디 말 내뱉지 못했죠 손톱 발톱 다 빠지도록 바닥을 긁던 저녁 번갯불 관통하는 아픔으로 덮어야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누군가는 내 꼬리를 잘라주어야 했고 나도 어떤 이의 꼬리를 모래언덕 깊숙이 묻었답니다 막 도착한 당신, 모래성 속으로 초대합니다 노을과 바람으로 몸을 씻어요 모래 미소와 모래 눈물로 배를 채우고 모래의 테라스로 걸어오세요 떠나간 모든 게 남아 있는 그림자를 안고 춤을 춥니다 잊지 마세요, 다 잊어버리세요 원반 같은 달 아래 엉덩이에 빗자루를 매단 코요테들..

한줄 詩 2020.08.03

우리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다 - 건국대 인류세인문학단

언젠가부터 인류세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뜻을 인간이 지구에 살며 내는 세금으로 이해했다. 평소에 환경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도 인류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다룬 인류세는 人類世다. 하긴 그동안 인류는 편리함만을 쫓느라 갖은 방법으로 지구를 빨아 먹은 세금을 치르고 있으니 人類稅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코로나 19로 인해 일상 자체가 바뀐 것은 그동안 인류가 겪어왔던 수많은 질병과의 싸움이니 예외로 치자.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미세먼지로 겪는 고통은 제대로 치르고 있는 人類稅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비교적 싸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겪을 고통(세금)이 더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 법칙까지 가지 않아도 세상엔 공짜란 없다. ..

네줄 冊 2020.08.03

네가 길이다 - 조성순

네가 길이다 - 조성순 순례자여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마라. 오직 자신을 의지하고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한다. 가고 있는 길이 의심나고 두려울 땐 걸음을 잠시 멈추고 조용히 내면에 귀 기울여 보라. 그러면 조개껍데기 골이 모이거나 노란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 그곳이 바로 야보고가 오신 길을 네 눈으로 말씀한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라. 느릿느릿 천천히 길이 열린다. 네가 바로 길이다. *시집/ 그리고 나는 걸었다/ 행복한책읽기 길 - 조성순 혼자 걸을 때 길은 말합니다. 묻지 않아도 가야 할 곳을 보여줍니다. 바람이 오고 물소리가 옵니다. 고요 속에 딱따구리가 딱딱 풀벌레가 푸륵푸륵 가슴으로 진격해 옵니다. 홀로 걸어야 길이 옵니다. 여럿이 왁자지껄 갈 때 길은 침묵합니다. 온전히 만나지 못합니다...

한줄 詩 2020.08.02

발칙한 생각 - 조성국

발칙한 생각 - 조성국 사업한답시고, 영업한답시고 진탕 통음한 단란주점 모자란 술값 대신 속옷까지 홀라당 저당 잡히고 쫓겨난 주제에 고주망태의 알몸이 낯부끄럽고 쪽팔리는지는 아는지, 그 정신에도 업소 청소용 검정 비닐봉지에다 눈구멍만 두 개 뚫어 가면 쓰듯 머리에 뒤집어쓰고 버젓이 아랫도리 벌거벗은 채 집에까지 냅다 뛰는 꿈 깨고 나서부터 하여튼 얼굴에 시커먼 철면피만 깔면 된다는 이념으로 넉살 좋게 밥 빌러 가는 접대의 발걸음 한결 가뿐해지는 것이었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한 식구 - 조성국 절집 근방까지 전도 나온 목사를 쳐다보는 스님의 눈빛이 그리 곱지 않았다 또 한바탕 치고받기라도 할 듯 목사도 도끼눈을 떴다 마을 사람을 제각기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힘겨루기 하는 이번 참에는 목..

한줄 詩 2020.08.01

먼 곳 - 정진혁

먼 곳 - 정진혁 잘 늙은 마루에 누우면 먼 파도가 몸 어딘가에 모르는 저녁을 두고 갔다 저 너머 장재도에 노란 원추리가 흔들려 갑자기 오후 6시가 사라졌다 유자가 파랗게 매달려 익어 가는 수요일이다 등 굽은 할매가 저녁을 차리는 민박집 뒤뜰 고요만큼 빨랫줄이 흔들리고 냄비는 달그락달그락 끓어넘친다 말라 가는 생선의 눈을 본다 문득 전생이 멀다 바람이 분다 배롱나무 붉은 너울이 친다 마당을 지나는 슬리퍼 소리가 어둠을 끌고 간다 모기향을 피우면서 달력을 본다 입추가 얼마 남지 않았다 눅눅한 노트에 뭔가를 적어 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벽에 등을 기대는 사이 여름의 끝이 보였다 알전구를 껐다 물방울 같은 귀뚜라미가 밤새 저 너머를 울어 준다 내용도 없이 눈물이 난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

한줄 詩 2020.08.01

욕창 - 심혜정

아내가 뇌졸중으로 모든 일상을 남에게 의존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부부는 자식이 셋이나 각자 살기 바쁘다. 부모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십시일반으로 엄마를 돌볼 도우미를 구한다. 싸게 구하려니 불법체류자인 조선족이다. 도우미는 종일 상주하면서 아내의 수발을 들고 남편의 식사까지 챙긴다. 자식들은 갈수록 엄마 대신 안주인 노릇을 하려 드는 도우미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종일 상주하면서 이 정도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넘긴다. 그래도 싹싹하고 일을 잘 한다. 그동안 어머니 수발에 지쳐 못 하겠다는 그만 둔 도우미가 여럿이다. 엄마에게 영화 제목처럼 욕창이 생긴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장시간 한 자세로 누워 있으면 욕창이 생긴다. 엄마의 욕창으로 이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그..

세줄 映 2020.07.31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 김윤배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 김윤배 분홍 꽃숭어리에서 몸내가 올라왔다 향기이기도 하고 정한이기도 했다 자미를 두고 설렘은 후회거나 탄식이었지만 홀로 피고 이울기를 한 계절이다 자미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꽃망울을 터뜨렸다 자미꽃 여름은 내내 혼돈의 서사들이다 우레 다녀가고 낙화의 새벽 뒤엉키는 일 잦았다 먼저 핀 꽃이 먼저 시들지 않는 모순, 낙화의 길에 들어서 뛰어내릴 순간을 찾는 일은 더 혼란스러웠다 보이지 않는 질서가 꽃 피우고 지우는 밀명, 이끌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끝내, 자미 꽃그늘 돌아서는 여름 한낮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미선나무의 흰 꽃의 시간 - 김윤배 척박한 봄이었으니 꽃차례조차 무한총상이다 너는 그렇게 봄의 시간을 묶고 삶을 묶는다 속수무책, 부러지기 쉬운 줄기..

한줄 詩 2020.07.31

첫 배를 타야겠다 - 이강산

첫 배를 타야겠다 - 이강산 꼭 한 사람 찾아가야겠다 웅크리고 앉아 바다를 뒤집어쓴 섬이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척여 바다를 잡아당기다 잠을 깼다 섬 홀로 두고 온 날은 꿈도 섬처럼 아득하다 닻을 내릴 틈도 없이 사라진다 팽나무 아래서 슬그머니 바다를 찔러보던 나처럼 지금쯤 섬도 선착장에 앉아 밀물을 집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다고 배가 달려오는 게 아니다 섬도 안다 외로워야 먼 길이 가까워진다 찾아갈 사람이 보인다 늦기 전, 첫배를 타야겠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손님 - 이강산 고향여인숙 9호실 불이 켜지자 간판 불이 꺼졌다 나는 또 마지막 손님인 모양이다 명성식관 소머리국밥집은 내 앞에서 문이 닫혔다 나는 속병이 심해져서 맨밥만 먹을 것인데, 이대로 잠들면 빈방처럼 속이 캄캄해질..

한줄 詩 2020.07.30

맨드라미 - 박춘희

맨드라미 - 박춘희 처음부터 빨갛게 끓어오르진 않았다. 빈집 우체통 곁에 함께 눈비 맞고 오래 기다려 주다가 날이 갈수록 날 선 독촉장에 속을 있는 대로 끓였다지. 그 여름 죽은 목소리를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단다. 수위를 넘긴 우체통 언제부터 수취 불능 상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때쯤 맨드라미 껴안고 악을 쓰다가 독기 빠진 글자들 씨앗으로 콕콕 박혔단다. 죽은 편지를 들고 조문조차 꿈꿀 수 없었던 그해 여름 수취 불능을 끄고 맨드라미 천천히 죽어 갔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파란출판 감정의 바깥 2 - 박춘희 칠월 땡볕 끈질기에 꼬이는 파리 떼 누군가에게 사체는 구멍마다 알을 슬어 놓는 아늑한 자궁이 되기도 하는데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파리의 일생이나 개의 ..

한줄 詩 2020.07.30